[꽃중년 여행노트] '아! 아르헨티나'...남미의 부국이 어쩌다?

[이상홍의 남미여행기⑧]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다
마이스투데이 2024-09-09 08:01:02

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독립과 민주화의 상징인 '마요 광장'과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 (사진=이상홍)

<7편 [꽃중년 여행노트] '파라과이 고난의 역사'에 마음을 빼앗기다>에서 이어집니다.


아르헨티나 국경도시 푸에르토 이과수는 이미 한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아르헨티나를 제대로 보기 위해 남미여행 6일차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이과수 공항(IGR)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는 2시간 정도 걸렸다. 초록의 산림이 가득한 나라에서 2시간만에 파란 하늘이 익숙하게 눈에 들어오는 도시로 이동했다. '자연환경도 그 나라의 국기를 닮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은 스페인어 '아르젠툼'(argentum)에서 유래됐다. '은의 나라'인 셈이다. 스페인의 탐험가들은 이 나라에 은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는데 정작 아르헨티나에는 은이 없고,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대박이 날만큼 많은 은이 발견됐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좋은 공기'라는 뜻인데, 지금도 이름처럼 파란 하늘에 깨끗한 공기를 자랑하고 있다. 호르베 뉴벨리 공항에 내리자, 바깥에 대서양이 시원하게 펼쳐진 해안가에 우뚝 서있는 콜롬부스 동상이 보였다. 콜롬부스가 이곳까지 항해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발견한 신대륙이 스페인 국왕에게 바쳐진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창밖에 펼쳐지는 광경이 유럽의 대도시에 견줘도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반듯하게 뻗은 넓은 도로, 4~5층 규모의 석조건물들이 가지런하게 붙어있는 모습, 시원한 가로수와 초록이 넘치는 공원, '남미의 파리'라는 명성에 부족하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파리와 마드리드 그리고 브뤼셀을 합쳐놓은 도시라고 극찬한 사람도 있다. 이 멋진 인프라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리 안정되지 못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의 볼거리

오후 3시에 도착한 탓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을 돌아볼 시간은 저녁식사 전까지인 4시간이 전부였다. 우리는 서둘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심장인 '마요 광장'에 내렸다. 가이드가 치안이 브라질의 리우만큼이나 험하니 카메라, 가방 잘 챙기고,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조심하라는 말에 살짝 주눅이 들긴 했지만, 따뜻한 날씨와 국기 색깔만큼이나 파란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광장을 걸으니 살 것같았다.

마요 광장(Plaza de Mayo)은 5월 혁명으로 시작된 이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 투쟁의 중심지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광장 한가운데 5월의 탑과 독립투쟁의 영웅인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기마상을 세웠다. 군사독재 때에 희생 또는 실종된 가족들의 어머니들이 이 광장에서 집회를 가지며 여론을 주도했다. 그때 만들어진 어머니회가 지금도 매주 목요일 3시에 흰색 스카프를 쓰고 5월의 탑 주변을 도는 행사를 진행되고 있다.

기마상 아래 계단에는 글씨가 새겨진 수많은 돌들이 보인다. 이 역시 이 어머니회의 아픈 사연과 관련있어 보였다. 그 옆 광장 바닥에 어머니회의 상징인 흰 스카프가 새겨져 있다. 어머니회는 지금도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며 활동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518과 관련해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 모임이었던 오월 어머니회와 유사한 모임인 듯하다.

오른쪽에 카사 로사다(Casa Rosada)라는 이름의 분홍색 저택이 대통령궁이다. 정문 근처에 큼직한 방송용 카메라를 든 사람들과 방송국 버스가 보였다. 뮤지컬 에비타(Evita)에서는 후안 페론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영부인이 된 에바 페론이 저 건물 이층 발코니에 나와 몰려든 국민들 향해 '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곡을 열창한다. 과연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일까? 나라를 나락에 떨어트린 천하의 역적일까?

길 건너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이 보였다. 아름다운 부조 성화가 새겨진 삼각형 지붕을 거대한 기둥 12개가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성당이란 느낌보다 신전 또는 유럽의 박물관 같다. 들어가 보려는데 경찰들이 문을 막고 있었다. 관광객이라고 해도, 미사를 보러 간다고 해도 턱도 없다. 집회에 참석한 시위자들이 성당에 몰려들 것에 대비해 모든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다고 했다. 대성당 안에는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작가가 그린 103위 한국인 순교성인 성화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와서 꼭 들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는 장면의 부조와 12개 기둥이 화려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사진=이상홍)

현재 바티칸에 있는 세계 가톨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며, 이 대성당 출신이다. 지금까지 266명의 교황 중에 남미 출신 교황은 처음이어서 성당 안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직접 확인을 못했다.

대성당 방향 도로의 끝이 공화국 광장이다. 광장에 세워진 흰색의 오벨리스크가 마요 광장에서도 보인다. 도시 건설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46년에 세워진 67m의 탑이다. 이 탑 양 옆에는 스페인에서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7월 9일 대로'가 지나간다. 폭이 144m에 20차선이라니 '대로'라는 이름에 어울린다.

마요광장을 떠나 엘 아테네오(El Ateneo)서점으로 향했다. 망해서 문을 닫은 오페라 극장을 인수해 서점으로 만들었다. 1층 좌우 가장자리 위에 2층, 3층 객석이 있는 오페라 극장의 구조를 그대로 살린 서점이 아름다운 서점으로 소문이 나면서 이 도시의 관광명소가 됐다. 고풍스런 계단도 멋지지만 2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림같다. 

아름다운 서점으로는 포르투갈 포르투에 있는 렐루 서점(Livrario Lello)이 있다. 이 서점에서 영감을 받은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라는 소설을 썼다. 지금은 입장하는데 4유로를 지불해야 할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내가 아는 또다른 유명 서점으로 미국 포틀랜드에 있는 50년 전통의 파월스 북스(Powell’s Books)가 있다. 보유한 책의 수가 세계 최대라는 명분으로 관광자원이 됐다. 도서관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우리나라 스타필드 코엑스몰에 있는 별다방 도서관도 충분히 아름다운 서가로, 자랑할 만한 관광자원으로 키워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관광명소가 된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 (사진=이상홍)

엘 아테네오 서점을 나와 호텔로 돌아오는데 도로가 많이 막혔다. 창밖을 내다보니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이 무리지어 인도를 지나고 있었다. 일부는 손에 피켓을 들고 있고, 허리에 북처럼 생긴 드럼을 들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인 듯하다. 알고보니 이날이 '여성의 날'이었다. 건수만 생기면 시위하는 게 이 동네의 일상이라고 했다.

골목 안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간판이 'Cambio'라는 환전소였다. 일행 중 일부는 호텔 근처를 산책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피곤하기도 하고 살짝 자신이 없어 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반나절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을 돌아봤고, 가이드로부터 아르헨티나 경제 사정도 들은터라,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지며 이 나라 사정을 좀 더 알아봤다.

▲여성의 날을 맞아 보라색 옷을 입고 시위중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여성들 (사진=이상홍)

◇ 부국의 몰락...국민의 40%가 '극빈층'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큰 나라다. 세계에서도 8번째로 크다. 면적이 우리나라의 30배에 이른다. 온화한 날씨에 팜파스라는 비옥한 초원만 남한의 8배나 될 만큼 축복받은 나라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농축산물을 수출하며 1900년대에는 세계 5대 경제대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913년에 지하철을 만들만큼 선진국이었다. 서유럽과 같은 문화국가를 꿈꾸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제2의 파리로 만들고, 유럽계 백인의 이민을 대거 받아들여 세계에서 백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에 하나가 됐을까? 잘나가는 시절에 벌어둔 부를 다 까먹고 지금은 국민의 40%가 극빈층이 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로 꼽히는 것은 토지개혁 실패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이후 토지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거대 지주들이 막대한 부를 독점했고 이들의 부정부패는 극심했다. 이들은 부의 기반인 농축산, 자원채굴 등 1차산업에서 제조나 중공업 등 2차 산업으로 변신하지 못한 구조적인 문제점을 무시할 수 없다. 권력을 잡은 페론주의자들은 세계화를 역행하는 고립주의와 국민을 달콤한 유혹에 빠지게 한 포플리즘이 보태진 것도 치명적 원인이다. 

후안 패론은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외국자본을 배제하고, 산업의 국유화를 시도했다. 임금인상과 복지 확대라는 인기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아르헨티나 국민, 특히 가난한 이들의 영웅이 된다. 은퇴자의 연금을 올리고, 노동자의 임금은 매년 20%씩 파격적으로 올리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국가예산의 19%를 생활보조금으로 퍼주는 등 국고를 주머니돈처럼 써버렸다.

수익보다 씀씀이가 더 큰 나라가 버틸 재주는 없다. 밑빠진 독을 채우기 위해 페소화를 계속 찍어내니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은 심해졌다. 산업 기반을 조성할 재원이 모두 푼돈으로 소비됐다.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가 보조금을 줄이는 등 긴축을 하니, 이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시위에 파업이 일상이 됐다. 현재 1달러는 약 900페소 정도지만 1991년에 1페소는 1달러의 가치였다고 한다. 지금도 공식 환전소보다 뒷골목에 가면 배가 되는 비율로 환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페소의 가치는 날로 떨어진다. 페소화의 가치 하락만큼 아르헨티나 경제도 불안하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오르고, 그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노사는 임금인상 100%를 쉽게 협상한다. 실질소득은 늘어나는 게 없고 가치가 떨어진 지폐를 넣은 지갑만 터질 듯 두툼해진다. 

▲도시건설 4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76미터의 '오벨리스크' (사진=이상홍)

IMF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디폴트 선언을 8번이나 할 만큼 힘든 경제 상황이지만 아직도 대학교육이 무상, 병원비가 공짜일 만큼 복지 혜택이 크다. 문제는 현금으로 주는 보조금 그리고 공짜의 맛은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에 이를 되돌리려는 시도는 정권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 패배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인 듯하다. 우선 전쟁을 치르느라 손실된 엄청난 자원과 패배에 따른 배상 책임이란 물적 피해도 컸다. 다음으로 남미에 세운 백인 국가라는 자존심 세우느라 주변 국가를 무시하고 폼을 쟀다. 전쟁이 일어나자 주변국들이 안면 몰수한 이유다.

이날 하루를 머문 내 눈에도 이 나라의 어려운 사정이 보였다. 대통령궁 앞에는 기자와 카메라가 몰려 있고, 골목에는 시위하는 사람이 넘쳐 길이 막혔다. 불안한 치안 때문에 관광객들은 자기 가방 살피기 바쁘고, 골목에는 불법 환전상이 넘쳐났다. 그리스 신전같은 대성당이 무슨 소용이고, 28일만에 지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 400년 기념 오벨리스크가 무슨 자랑거리이며, 32차선의 세계 최대폭의 '4월 9일 도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축구스타 마라도나, 메시에 이어 비로마 출신 최초 교황 프란치스코 출신국을 자랑하지만 동성결혼이 허용된 나라다. 라보카 부두 노동자들의 피곤함과 애환을 술 한 잔과 찐득한 탱고로 달래며 백인 천국을 꿈꾸었던 아르헨티노들. 같은 빨대로 마테차를 나누고, 인사같은 볼 키스를 나누는 백인 나라는 만들었지만, 환율을 20년만에 100배도 아닌 1000배로 올린 기적의 나라. 새 대통령은 페소화를 아예 폐기하고 달러를 국가 통화로 채택하는 공약까지 내걸었다.

상류층 백인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로 빠져나가고, 서민들은 이미 공짜의 늪에 빠져버린 나라다. 꿈꾸던 천국은 요원해 보인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