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년 여행노트] 지배와 저항의 역사가 공존하는 '산티아고'
2024-11-04
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10편 [꽃중년 여행노트] 땅 끝 도시의 킹크랩과 비글 해협>에서 이어집니다.
우스아이아를 뒤로 하고 우리는 비행기로 파타고니아의 중심인 칼라파테로 향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실로 먼 여정이라 바짝 긴장됐다. 우선 우수아이아 공항에서 칼라파테 공항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다음 전용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버스로 황량한 파타고니아 벌판을 3시간 30분 달려서 숙소가 있는 엘찰튼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파타고니아에서는 넉넉잡고 나흘가량 머물 예정이다. 그러려면 파타고니아에 대한 이해가 우선 필요할 듯했다. 흔히 '파타고니아'하면 지역보다 미국의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같다. 실제로 '파타고니아' 제품은 친환경을 추구하는 개념있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버려지는 폐페트병으로 의류를 만들고, 생산공정 자체도 친환경적이며, 기업의 수익 상당부분을 지구온난화에 대응하는 단체나 환경활동가들에게 기부한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태초의 자연 '파타고니아'와 잘 어울리는 브랜드다.
◇ 5090km 길이의 도로 '루타40'
지형적으로 볼 때 파타고니아는 남미의 최남단 지역으로 남위 40도 이하 네그로강 남쪽 전체를 통칭한다. 안데스산맥을 기준으로 태평양 쪽은 칠레 파타고니아이고 대서양 쪽은 아르헨티나 영역이다. 1520년 마젤란이 이 지역을 처음 탐험했을 때 만난 원주민인 테우 엘 체족을 보고 판타곤이라는 거인이 사는 지역이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 지역명이 됐다. 당시 이 지역 원주민의 신장이 180cm 정도였는데, 150~160cm 정도의 스페인 사람들 눈에는 충분히 거인으로 보였을 듯하다. 키도 컸지만 그들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신었던 과나코 가죽 부츠가 남긴 큰 발자국에 더 놀랐다고 한다.
그린랜드와 남극 다음으로 큰 얼음덩어리 만년설이 있고, 이 얼음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빙하 그리고 수많은 빙하 호수가 있다. 세계 5대 미봉으로 꼽히는 피츠로이산도 이곳에 있다. 태고적 자연 그대로의 신비스런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충분하다. 빙하 호수 외에 넓은 초원과 사막 그리고 거센 바람이 이 지역의 특징이다. 칠레 쪽은 안데스 산지로 산악지형이고, 해안은 침식작용이 심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을 보인다. 반면 아르헨티나 쪽은 건조한 기후에 넓은 초원이 발달되어 있다.
숙소가 있는 엘찰튼으로 가는 길인 '루타40'(Ruta no.40)은 전형적인 파타고니아 벌판을 보여준다. 도로 양 옆으로 숲이 거의 없고 사막인 듯 초원인 듯한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런 반 건조지역을 스텝(steppe) 지역으로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초원이 더 넓게 펼쳐진 비옥한 지역을 보면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배운 팜파스(pampas)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루타40을 4시간 가까이 달리면 야생동물들을 쉽게 만난다. 들판 위에는 과나코 무리가 뛰어다니고 하늘에는 소리없이 비행하는 콘도르를 만난다. 가끔씩 만나는 호수는 바다같이 넓고, 빙하가 녹은 물이 고인 호수의 에메랄드 빛 수면은 비현실적이다.
길 옆에 낮은 기둥으로 쳐둔 철조망이 보였다. 소나 양을 키우는 목장 또는 농장 영역임을 표시한다. 철조망 바깥과 별 차이가 없이 황량해 보인다. 이 지역 개인농장의 규모가 작아도 축구장 5000개 정도라고 하니 입이 쩍 벌어진다. 벌판 곳곳에 듬성듬성 풀무더기가 보였다. 꼬이롱(coiron)이라는 풀인데 철망 안의 양들이나 밖의 야생동물 과나코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식량자원이다.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루타40을 따라 목적지 엘찰튼으로 가는 중간에 라 레오나(La Leona)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에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하루를 자고 갈 수 있는 숙박시설도 있었다. 루타40을 알리는 오각형 안내판이 이 휴게소의 메인 기념품이다. 안내판 위쪽에 날개를 편 콘도르와 아르헨티나 국기가 좌우에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루타40이라는 도로 표시가 적혀있다. 루타40은 파타고니아 지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 남북을 잇는 고속도로인데 총길이가 5080km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 중에 하나다.
벽에 4000달러 현상금이 걸린 은행 강도 부치 캐시디의 사진이 든 낡은 포스터가 붙어있다. 국내에도 방영된 1969년 작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서부영화가 있었다.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이었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2인조 은행 강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제 주인공인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은행털이 후에 이 휴게소에 피신했다고 한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배역으로 열연한 선댄스의 이름이 저예산의 독립영화제 이름이 되어 선덴스 영화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작은 휴게소 안에 이런 다양한 스토리가 있으니 루타40을 달리는 관광객들이 꼭 들러 인증사진을 남기는 명소가 됐다.
휴게소 마당에 세계 주요 도시로 가는 방향과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서울이 들어있어 반가웠다. 거리는 1만7931km다. 루타40은 2000km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며 볼리비아에 이른다. 휴게소 바로 앞에 거센 바람에 맘껏 펄럭이는 아르헨티나 국기가 걸려있는데 그 앞이 에메랄드빛 수면의 라 레오아강인데 이게 강인지, 호수인지 헷갈리고 바다라 해도 믿을 만큼 넓다.
거의 4시간이 걸려 엘찰튼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이란 표시가 있는데 멀리 엘찰튼 마을이 보이는 멋진 뷰포인트이다. 둥근 모양의 국립공원 엠블럼이 붙어 있는데 그 안에 피츠로이산, 모레노 빙하, 그리고 과나코가 그려져 있다.
◇ 세로토레 트래킹 그리고 피츠로이 첨봉
4시간이나 걸려 엘찰튼 마을까지 애써 달려온 이유 중 하나는 세로토레 트래킹을 하기 위해서다.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에는 2개의 유명 트래킹 코스가 있다. 하나는 피츠로이 트래킹이고 다른 하나는 세로토레 트래킹이다. 2개의 산 모두 3000m가 넘는 첨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첨봉의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산 아래 호수를 향해 걷는 트래킹 코스가 있다. 그 중 세로토레 트래킹은 비교적 쉬운 코스로 토레 호수까지 왕복 20km가 조금 넘는다.
다음날 우리는 세로토레 트레킹에 나섰다. 아침 9시에 호텔에서 현지 전문산악 가이드 2명과 함께 출발했다. 마을을 지나 오르막 산길에 오르기 전 뒤뚱뛰둥 걸어가는 오리떼를 만났다. 파타고니아에 사는 오리 또는 거위이니 이 동물의 털이 파타고니아 패딩 의류에 들어가는 고급 다운의 재질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트레킹 시작 지점까지 꼬박 30분 오르막 산길을 걸어야 했다. 구름이 잔뜩 깔려있어 덥지는 않았지만 오늘 안으로 원하는 세로토레 첨봉을 보지 못할까 걱정이 앞섰다. 트래킹 시작점 이정표(Senda a Lguna Torre)에서 반환점인 토레 호수까지가 9km이다. 난이도는 보통이라고 하지만 만만찮은 산길 오르막은 전망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1km를 조금 못 미쳐 마르가리타 폭포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 아래로 보이는 계곡은 제법 길고 깊었다. 그 사이로 흐르는 물길이 마르가리타 폭포인 듯하다. 계곡 뒤 열린 공간의 구름 뒤로 바위 설산이 보였다. 아마 세로토레 봉우리 중에 하나일 듯하다. 가장 날카로운 첨봉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전망이 가장 좋다고 하는 세로토레 전망대까지 왔지만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토레 호수까지 능선 산길, 고원 벌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숲속 길도 있고, 만년설이 녹은 작은 개울이 심심찮게 나타나는 편안한 트래킹 코스다. 총 9km를 매 1km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어 남은 거리를 쉽게 알 수 있게 해뒀다.
인상적인 두 가지 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파타고니아 지역명으로도 사용되는 칼라파테(calafate)이고, 다른 하나는 가시풀 같은 네네오(neneo)이다. 몽블랑에서 보던 꽃도 보인다. 꽃은 지고 털북숭이 열매만 긴 꽃대 위에 남은 고산 할미꽃(Western Anemone)이다. 남미든 유럽이든 고산에는 비슷한 식생이 있기 마련이다.
빙하가 녹으며 만든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위를 건너기 위해 마른 고목을 얼기설기 걸쳐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얼음처럼 찬 물에 땀을 식혔다. 날이 개며 하늘은 파란 모습을 찾아가지만 첨봉에 걸린 구름은 아직 세로토레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너도밤나무 숲을 지나 아고스티니 캠핑장 가는 삼거리까지 편안했던 길이 토레 호수 쪽으로 다시 가벼운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트래킹 시작 거의 4시간 만에 토레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는 언덕까지 도착했다.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식사를 마치고 아래로 내려가 호수에 접근했다. 호수는 토사가 덜 가라않았는지 회녹색이었다. 호수에 푸르스름한 조각 빙하가 떠다녔다. 소위 유빙이다. 호수가에 작은 얼음 조각을 손에 들고 살짝 깨물어봤다. 그냥 얼음과 달랐다. 차기도 하지만 너무 단단했다.
호수 뒤쪽으로 그림같은 세로토레 삼봉을 보기를 바랐지만 딱 그 자리에만 구름이 자리를 잡고 지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괘씸한 구름이다. 사진으로 보면 송곳처럼 뾰쪽한 봉우리가 3개가 있고 그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세로토레다.
더 이상 기다릴수가 없어 토레 호수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마르가리타 폭포 전망대에 이르니 세로토레 삼봉의 아래쪽은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첨봉에만 구름이 걸려있다. 대신 오른쪽으로 멀리 피츠로이 첨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오는 길에 산에서 내려다보니 엘찰튼 마을이 험한 산에 둘러싸인 분지 속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호텔에서 출발한 시간으로 보니 총 20.3km, 7시간50분이 걸린 트래킹이다.
엘찰튼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시 루타40번을 반대로 달려 칼라파테로 갔다. 어제 마을에 들어설 때 봤던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오니 멀리 피츠로이 첨봉이 오전 내 끼었던 구름을 다 몰아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해진 일정에 맞춰 여행을 하다보면 기상이나 지역 사정 등 다양한 문제로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거나 원하는 풍광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쉽지만 그것 역시 여행의 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엘찰튼에 와서 트래킹을 하며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끝내 날카로운 세로토레 첨봉은 눈에 담지 못했고, 피츠로이는 돌아가는 길에 얼굴을 내밀어 운좋게 카메라에 담았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어제 왔던 길을 그대로 달려 칼라파테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연어 스테이크에 파타고니아 맥주를 한 잔 걸치며 긴 하루를 마무리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느꼈던 한심함과 답답함이 남쪽 항구 도시 우수아이아에서 시원한 바다와 싸늘한 공기를 마시니 제법 풀렸다. 파타고니아의 하늘과 땅, 사람과 음식, 바람과 바다를 보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품었던 실망스러움에서 벗어나, 아르헨티노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구현할 또다른 힘과 가능성을 느낀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