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년 여행노트] 전통의 '촐리타'와 현대의 '텔리페리코'
2024-11-18
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11편 [꽃중년 여행노트] 태고의 자원 '파타고니아'의 첫날>에서 이어집니다.
'루타40' 고속도로를 오가며 파타고니아의 광활한 초원을 확인했고, 세레토네 트레킹으로 파타고니아의 산길과 숲길을 걷고 첨봉에 감탄했지만, 또다른 자랑거리인 빙하와 바람은 아직 맛보지 못했다.
그래서 하루종일 파타고니아 빙하를 보기로 했다. 칼라파테에서 빙하 유람선을 타는 반데라 항까지는 47km를 달려야 한다. 아침 7시30분에 출발해 거의 1시간이 걸렸지만 가는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길가에 펼쳐진 초원과 호수의 멋짐에 감탄했고, 호수 건너편 돌산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붉게 변하는 모습은 신비스러웠다.
항구에 내려보니 유람선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물 위에 나무 데크로 둥둥 떠있었다. 데크 길 옆에는 아르헨티나 국기가 쉴새없이 펄럭였다. 거친 바닷 바람탓인지 국기의 반은 다 헤져 있었다. 국가의 흰 바탕 가운데 있는 태양 문양이 사라지고 없다. 훼손된 국기를 수시로 교체 할텐데 저 정도인 것을 보면 그만큼 바람이 거세다는 이야기다.
아르헨티노 호수는 이름 그대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호수다. 배를 타고 하루종일 호수를 도니 유람이 맞고, 유람 중 가장 큰 일이 빙하 보는 일이니 빙하유람선이다. 오후 4시가 넘어 페리노 빙하 전망대 근처에서 하선했다. 태평양에서 생긴 비구름이 높은 안데스 산맥에 걸려 눈이 된다. 이렇게 내린 눈이 쌓여 만들어진 안데스 만년설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빙하지역을 만들었다. 아르헨티나 지역인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 내에 47개의 큰 빙하가 있는데 그 중 13개가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국립공원 이름이 '글라시아레스' 즉 빙하인 이유다. 우리는 아르헨티노 호수를 도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웁살라 빙하, 스페가찌니 빙하 그리고 가장 유명한 페리노 모레토 빙하를 차례로 둘러봤다.
◇ 빙하유람선에 오르다
오전 9시30분 유람선이 출발했다. 3층 규모의 유람선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족끼리 온 관광객들이 가장 많아 보였다. 빙하를 가까이서 관찰하는 또다른 방법은 직접 빙하 위를 트레킹하는 것이겠지만 가족 단위로 편하게 즐기기에는 빙하유람선이 더 적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람선 창 밖으로 펼쳐진 맑은 날씨의 파란 하늘, 짙은 에메랄드 빛 호수가 너무 평화스럽다. 바깥으로 나가 유람선 뒤에 매달린 아르헨티나 국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바람이 너무 거셌다. 서 있기가 쉽지 않았다. 한 손은 날아갈까 염려스런 모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서야 인증사진을 겨우 하나 건졌다.
배 안에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물마시듯 즐긴다는 마테차를 가족끼리 나눠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마테차가 민족차가 된 이유에는 면역력 증진에 효과적이고 집중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마테차를 나눠야 마음을 나누는 진짜 친구로 인정한다는 말이 있다. 병에 든 마테차를 봄빌야(Bombilla)라는 빨대로 돌려가며 빨아 마시기 때문이다.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가 2022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도 한 빨대를 나누는 마테차의 힘도 작용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같은 빨대를 사용하다니⋅⋅⋅.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친구하기가 진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에 떠다니는 유빙이 곳곳에 보였다. 큼직한 유빙이 보이면 친절하게 유람선이 가까이 다가간다. 어제 토레 호수에서 본 유빙과 달리 크기가 엄청났다. 태양 빛을 받으며 하얗게, 그리고 파란색으로 빛나는 유빙이 신비스러웠다.
빙하가 일반적인 얼음이나 눈과 달리 파란색을 띠는 이유가 뭘까? 모든 물체는 빛을 받으면 파장의 일부를 흡수하거나 반사한다. 이때 반사하는 파장의 색을 사람의 눈이 색깔로 인지하게 된다. 눈이나 얼음은 대부분의 파장을 흡수하지 않고 반사하기 때문에 흰색으로 보이지만, 빙하는 다른 빛은 다 흡수하고 파장이 짧은 파란색 계통을 반사한다. 그래서 파란색으로 보인다.
그럼 빙하는 왜 파란색만 반사하는가?
빙하는 내린 눈이 오랜 세월동안 녹지 않고 계속 쌓이면서 만들어졌다. 겹겹으로 쌓인 눈의 무게는 엄청나다. 이 무게로 눈은 고압으로 눌려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별모양의 눈의 입자 구조가 파괴된다. 또 산소를 포함한 기포는 거의 없어진 채로 단단한 결정이 된다. 이 단단한 결정은 다른 빛을 다 흡수하고 파란색만 반사시킨다. 파란색의 농도가 빙하마다 조금씩 다른 것은 내부에 품고 있는 산소의 농도 차이 때문이거나 표면에 덮인 먼지, 진흙, 해조류 등의 영향일 수도 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 '페리토 모레노'
유람선은 12시쯤 호수 내에 있는 작은 섬에 정박했다. '푸에스토 라스 바카스(Puesto Las Vacas)'라는 무인도다. 섬에 내리니 바로 앞에 '페럴 캐틀(feral cattle)'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개조심이란 말은 들어도 소조심이란 말은 처음이다.
이 섬에는 초기에 소를 방목하며 이를 업으로 사는 농부가 있었다. 이 사람이 떠나고 더이상 사는 사람이 없어지자 남아있는 소들이 울타리를 뛰쳐나가 인간의 도움없이 이 섬에서 겨울 추위와 바람을 이기며 종족을 번식하고 살아남았다. 소위 야생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섬의 주인이 된 소를 방문객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다. 길가에 퍼질러 싸놓은 소똥무더기가 살짝 걸리긴 하지만 쓰러진 고목들을 모아 만든 길은 안전하고 편했다. 짧은 트래킹이었지만 지루한 선내를 벗어나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즐기기에 충분했다.
빙하유람선에서 그 유명한 웁살라빙하와 스페가찌니빙하를 감상했지만 뭐니뭐니 해도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최고였다. 호수 수면까지 내려온 모레노 빙하는 크기나 모양에서 압도적이었다. 1831년 다윈이 이 호수를 탐험할 때 근처까지 갔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 후 1877년 아르헨티나의 탐험가 프란시스코 모레노 박사가 최초로 발견하면서 호수이름에 '모레노'가 들어갔다. 어쩌면 다윈빙하가 될 뻔 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소문난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유람선에서 대충 보고 갈 수는 없다. 페리토 모레노 전망대로 가는 항에서 유람선에서 내렸다. 휴게소에서 내려다보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도 멋졌지만 구불구불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계단을 내려가면 빙하에 가장 가까운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휠체어도 충분히 내려갈 만큼 완만하게 만들어진 데크 길이다. 전망대 앞에 펼쳐진 모레노 빙하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전체 길이는 약 35km에 이르는데 아르헨티노 호수에 걸쳐진 것만 4km라고 한다. 호수에 닿은 얼음벽의 높이가 무려 60~70m.
거대한 빙하가 눈 앞에 펼쳐졌다. 멀리서 보니 호수에 떠 있는 섬 같았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빙하는 마치 접근하지 말라는듯 뾰쪽한 성벽을 길게 쌓아둔 것같았다. 빙하 트래킹을 하면 저 성벽 위를 걸을 수 있나 보다. 빙하 뒤쪽은 바위 설산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색깔이 신비스럽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 죽기전에 꼭 봐야 할 자연유산이라는 말에 어울린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쩌어엉'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였다. 저런 소리를 내다가 빙벽 앞쪽이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무너져 내린다고 한다. 운이 좋으면 눈앞에서 빙벽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한다는데 짧은 시간 빙하를 즐기는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없었다. 빙하는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호수 쪽으로 하루에 2m씩 밀려나온다고 한다. 움직이면서 부서져 내리고 소리까지 내니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살아있는 빙하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지금의 속도로 온난화가 진행되면 반세기 전에 이 빙하도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한다.
칼라파테 시내로 돌아오니 저녁 6시가 됐다. 시내는 관광지 도심답게 기념품 가게, 식당들이 즐비했다. 나름 깨끗하다 했는데... 개들이 거리 곳곳에서 엎어져 자고 있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 들어가 칼라파테 열매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빙하수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칼라파테 열매를 먹으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먼 곳을 어찌 다시 올 수야 있겠냐마는 여기까지 와서 칼라파테 아이스크림은 먹으며 엉뚱한 상상을 해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었다.
◇ 칠레 파타고니아로 가는 길
남미여행 11일차. 아르헨티나 여행을 마무리하고 칠레로 들어가는 날이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를 떠나 칠레 파타고니아로 가는 날이다.
국경을 넘기전에 아르헨티나 양 목장에 들렀다. 1875년 영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온 증조부 때부터 이 농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2만3000헥타르의 땅을 받아 농장을 시작했는데 한 때는 양을 8000마리까지 키웠는데 지금은 3000마리 정도를 키운다고 했다. 예전에는 말을 타고 다니며 양을 돌보는 일꾼인 가우쵸가 있었지만 지금은 양몰이 개 보더콜리가 그 몫을 다하고 있었다. 넓은 농장에 양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주인이 휘파람을 불자, 보더콜리가 쏜살같이 농장으로 달려가더니 근처 양들을 몰아 주인 앞까지 데려왔다. 4~5명 사람 몫을 충분히 하는 듯 보였다.
농장에서 양털을 깎는 시범을 보여주는데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양 우리에 주인이 다가가자 겁먹은 양들이 문 반대쪽 귀퉁이로 모두 피했다. 무언가 불행한 일이 닥칠 가능성을 분위기로 벌써 느낀 것이다. 그 중 한 놈이 목이 잡혀 끌려나온다. 목이 잡히고, 가랑이에 끼워 제압된 양의 털이 순식간에 깎여나간다. 버둥거리다가 포기한 양의 애처로운 눈을 보는 일도, 몸을 싸고 있는 털이 깎여나가며 하얀 배가 드러나는 모습도 안쓰럽다. 최대한 빨리 깎아주는 것이 양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일이라고 한다. 공감이 간다. 1마리에 4~5kg의 양털을 생산한다고 한다. 한때 아르헨티나는 양모 수출로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양 목장 투어의 마지막은 숯불에 통째로 구은 양 아사도(asado)가 점심 메뉴로 나온다. 일종의 만두인 엔파나다. 그리고 와인이 보태진다. 양고기 인심도 좋다. 사각진 철판에 수북히 올려진 아사도는 원하는 데로 계속 리필해준다.
양 목장 투어를 끝으로 아르헨티나를 떠나 칠레로 들어간다. 아르헨티나 국경에서 출국심사를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옆 건물로 이동해 칠레 입국심사를 마쳤다. 말이 국경이지 파타고니아 초원 내 같은 도로이고 분위기도 별 차이가 없다.
칠레 파타고니아의 대명사인 토레스 델 파이네로 달려가는 황량한 초원길이 계속 이어졌다. 초원을 달리는 과냐코 무리를 보며 지루함을 달랬다. 칠레 국경을 들어서서 2시간을 달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 있는 리오 세라노(Rio Serrano) 호텔에 도착하며 우리는 칠레 여정을 시작했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