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년 여행노트] 남미의 부자나라 '칠레' 맛보기

[이상홍의 남미여행기⑭] 산티아고와 와이너리 체험
마이스투데이 2024-10-28 08:01:02

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칠레 파타고니아 항구도시 '푸레르토 나탈레스' (사진=이상홍)

<13편 [꽃중년 여행노트]트래커 성지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하루>에서 이어집니다.


벌써 남미여행 13일차. 파타고니아를 떠나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이동했다. 칠레 파타고니아에서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른 도시는 점만 찍고 다녔다. 칠레 파타고니아 여행의 베이스 캠프라 할 수 있는 작은 어촌마을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저녁에 도착해서 하루 자는 걸로, 그리고 푼타 아레나스는 파타고니아를 떠나는 공항으로만 들렀다. 이 지역 도시들은 대부분 양 목축업이 대박을 내자 양고기나 양모를 수출하기 위한 항구 도시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가는 관광객 그리고 트래커들을 위한 거점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점만 찍고 가긴 아쉬운 마음에 호텔에서 아침을 먹기전에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피요르드 해안을 산책했다. 비도 살짝 내려 한기가 남아있지만 코 끝으로 전해오는 해안의 청량한 공기가 너무 좋았다. 하늘로 높게 솟은 굽은 철봉 끝을 한 손으로만 잡고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거친 바람을 온 몸으로 받는 조형물이 너무 멋지다. 바람이 거친 푸에르토 나탈레스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라고 한다. 해안가에 널찍하게 펼쳐진 자전거 스케이트 보드장이 보였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자전거나 보드를 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가 눈길을 끌었다. 

칠레 파타고니아의 가장 큰 도시인 푼타 아레나스는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와 느낌이 비슷했다. 두 도시 모두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도시로 각 나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한때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장 빠르게 연결했던 마젤란 해협의 중심인 푼타 아레나스가 우수아이아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다. 두 도시 모두 지형적으로나 국경선 때문에 자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육로로 연결돼 있지 않고 항공편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수아이아까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 모두 비행기로 3시간 30분 내외의 거리다. 두 도시가 남극을 가는 관문도시로 경쟁중인 것도 공통점이다. 

◇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

푼타 아레나스에서 비행기로 타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나니, 비로소 칠레라는 나라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남미의 안데스 산맥과 태평양 연안을 길게 끼고 있는 칠레는 세계에서 남북으로 가장 긴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남북의 길이가 무려 4270km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칠레가 가장 긴 나라가 아니다. 브라질이 4378km로 가장 긴 나라다. 다만 칠레는 남북의 길이에 비해 동서의 폭이 177km로 좁다보니 가장 긴 나라처럼 보일 뿐이다. 나라가 남북으로 길다보니 기후대도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건조한 사막기후부터 살기좋은 지중해성 기후 그리고 비도 바람도 물도, 수목도 넘치는 파타고니아 지역을 포함해 7종류나 되는 기후대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역사와 경제를 조금 첨언하자면, 칠레는 사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인기없던 가난한 나라였다. 금이나 은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정복자들의 욕구를 채워줄만한 자원도 없었고, 안데스 산맥의 서쪽이라는 위치가 유럽에서 접근하기엔 너무 멀었다. 거기다가 스페인 정복군을 대상으로 끝없이 저항하는 원주민 마푸체족의 전투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골드러시가 진행되면서 비옥한 농토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남북의 길이가 4270km에 이르는 칠레의 지도

칠레는 독립 후 태평양 전쟁의 승리로 페루로부터 아리까 지역을 챙기고, 볼리비아로부터 아타까마 사막을 확보했다. 아타까마 사막에서 나온 구리로 칠레는 세계 최고의 구리 생산국이 된다. 구리와 초석은 칠레를 부국으로 만드는 '효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피노체트의 개발 독재를 거쳐 산업화와 무역자유화 그리고 마약조직 퇴치를 통해 사회가 안정되면서 칠레는 우루과이와 함께 남미 최고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스페인 북부 카스티야와 바스크 지역의 이민자들이 칠레 정치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이탈리아와 독일 등에서 많은 이민자들을 받으면서 칠레는 아르헨티나 못지않게 한때 백인국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유럽에서 이민온 백인 30%에 혼혈인 66%로 구성돼 있다. 최근에는 주변국인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더 멀리 있는 콜롬비아 노동자까지 일자리를 찾아 몰려온다.

남미에는 글로벌 항공사로 브라질의 TAM항공과 칠레의 LAN항공이 있다. 그런데 LAN항공사가 브라질의 TAM항공을 인수해 LATAM항공그룹으로 재편되면서 칠레는 남미 최대 항공사를 보유한 나라가 됐다. 강국이라고 폼 잡던 브라질은 체면을 구겼고, 칠레는 세계 10위권 항공사를 보유하게 됐다. 하지만 내가 이번에 경험해보니 LATAM항공은 아직 우리나라 대한항공 수준의 글로벌 서비스를 따아오려면 요원해 보였다.

안데스산맥의 청정 빙하수, 큰 일교차에 건조한 날씨, 병균에 강한 구리성분이 많은 토양에 낮은 인건비의 노동력까지 보태며 세계 최고의 가성비 높은 와인을 생산하는 칠레. 이곳에 생산된 와인의 70%는 수출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이후 수입된 칠레의 와인으로 우리나라 와인 시장의 판도가 뒤집히기도 했다. 

칠레의 수도이름 '산티아고'는 가톨릭의 성인 '야고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스페인에도 순례지로 유명한 산티아고가 있어, 산티아고 데 칠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구분해야 한다. 산티아고 데 칠레는 스페인 산티아고만 알던 내가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도시였다.

◇ 칠레 최고의 와이너리를 가다

산티아고 투어의 첫 코스는 와이너리였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외곽에 있는 칠레 최대 와이너리 '콘차이 토로(Concha y Toro)'에 도착했다. 칠레 귀족가문 돈 멜초르는 1883년 이곳에 고급저택을 짓고 인공연못을 조성한 여름별장을 만들었다. 빈번하게 열리는 파티를 위해 포도밭을 가꾸고 와인 생산을 시작했다. 별장이 위치한 마이포 밸리(Maipo Vally)는 기후나 토양이 포도를 생산하기 최적지였다. 프랑스에서 까르비네 쇼비용, 까르네 블랑, 메를르, 피노누아, 까르미네르 등 다양한 품종을 가져와 포도밭을 가꾸고,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1933년 첫 수출을 시작한 이곳의 와인은 현재 전세계 140여개국으로 수출되면서 세계적인 와이너리로 성장했다. 특히 까르미네르 품종은 습한 기후의 프랑스 보르도에서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칠레의 고온건조한 기후와 잘 맞아 떨어지면서 지금은 칠레 최고의 포도주 품종이 됐다.

▲칠레 최고의 와이너리 '콘차이 토로' (사진=이상홍)

와이너리 투어는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투어그룹을 식별하기 위한 띠 스티커를 손목에 감고 베이지색 정문으로 들어섰다. 마로니에, 야자수 등으로 잘 가꿔진 키 큰 수목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와이너리가 아니라 마치 공원에 온 것같았다. 시원한 호수 건너편에 예쁜 정원이 있고, 그 정원과 분수 뒤에 분홍색 단층저택이 보였다. 포도밭을 처음 시작한 돈 멜초르의 저택인 듯했다. 와이너리를 하지말고 예쁜정원이 가득한 저택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23종의 포도가 자라는 포도밭으로 갔다. 좁은 도로 사이로 키 작은 포도들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말뚝으로 세워둔 안내판에 어떤 포도품종인지 설명돼 있었다. 포도밭 사이에 세워둔 기둥과 철망에는 큼직한 잎을 매단 포도 줄기들이 올라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 잘 익은 포도송이가 숨어있었다. 원하는 품종의 포도를 따서 맛보는 것이 이날의 첫 체험코스였다. 3월인데도 검게 익은 포도알맹이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포도밭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새콤달콤한 포도를 하나씩 따서 맛봤다.

지구 반대편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3월인데 서울의 9월 날씨였다.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다. 포도나무에 알맹이를 여는 것도 당연하고, 마로니에가 열매를 매달기 시작하는 것도 당연하다. 인공연못에는 수련이 보였다. 수련은 윤기나는 둥근 잎 사이로 하얀색과 분홍색 꽃을 수면 위로 피워올리고 있다. 

품종별로 포도 맛보기 체험이 끝나자, 포주 시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가 3종의 포도주를 가져와 설명을 했다. 시음이 시작되기 전에 와인잔이 2개씩 든 주황색 종이박스를 개인들에게 나눠줬다. 와인잔은 시음용이기도 하고 와이너리 방문 기념품이기도 했다. 시음할 와인은 소비뇽 블랑, 이 지역 특산인 까르미네르, 까르비네 쇼비앙이 순서대로 나왔다. 까르비네 쇼비앙인 마르께스(Marques)는 스페인 국왕 필리프 5세가 돈 멜초르 가문에 수여한 작위명을 붙인 와인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시키는대로 와인을 잔에 따라 빛깔도 보고 입에 넣어 굴려서 맛도 음미했다. 와인에 그닥 진심이 아닌 내가 와인 3종의 섬세한 맛을 감별하고 느끼기란 쉽지 않다.

수련이 만발한 연못을 지나 우리는 와인 저장고로 향했다. 1층에 오크통이 가득했다.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이 오크통은 1통당 와인 300병이 나온다. 지하는 밝은 1층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계단 아래쪽 아치형 입구의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아치 위에 'Casillero del Dablo'라고 적혀있다. '악마의 저장고'라는 뜻이다. 지하저장고는 전체적으로 아치형 구조로 돼 있었다. 낡은 벽돌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천창으로 내리쬐는 빛과 통로의 조명 몇 개가 지하의 어둠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이 지하공간은 원래 스페인군의 도주로로 만든 곳인데 와인 저장고로 변신했다고 한다. 와인의 저장과 숙성을 위해 필요한 80% 습도, 13℃ 내외의 천연 저장고다. 

▲와인을 보관하는 지하의 '악마의 저장고' 내부 모습 (사진=이상홍)

갑자기 지하저장고의 불이 모두 꺼지더니, 이곳이 악마의 저장고가 된 사연이 벽면에 영상으로 펼쳐졌다. 이곳에 저장해놓은 와인 맛이 소문이 나면서 매일 와인이 몇 병씩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와인 도둑을 쫒아내기 위해 돈 멜초르는 숨어서 악마의 울음소리를 냈다. 또 이 저장고에 악마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내면서 더이상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영상은 뿔이 나고 삼지창을 든 악마의 그림자가 벽면에 나타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스토리를 만든 디아블로가 콘차이토르 외이너리의 고급와인 중 하나다. 

체험을 마치고 우리는 와이너리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 'BODEGA 1883'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음식의 맛이나, 와인 그리고 서비스가 고급 레스토랑답게 일품이었다. 스테이크가 원하는 만큼 익지 않았다는 어떤 이의 클레임에 세프에 매니저까지 나와 사과하고 스테이크를 새로 구워서 직접 가져왔다. 시간은 걸렸지만 서비스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식사 후 남은 시간에 와인샵에 들렀다. 사실 아직 여행일정이 많이 남아있고, 로컬항공사 수화물 부피도 걱정되어 선뜻 와인을 구매하는 것이 주저됐다. 와이너리 창업자 이름을 딴 '돈멜초르 2020'이 210달러, 국내에서 아름을 들어보았던 고급와인 '알마비바 2021'산이 280달러였다. 1병에 30만원이 훌쩍 넘었다. 와인에 진심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파손위험도 염려스러워 나는 고급와인을 그저 눈으로 즐기는데 만족했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

6일 '서울카페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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