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제19편 [꽃중년 여행노트] 4100m에 펼쳐진 초원과 암석 그리고 호수>에서 이어집니다.
안데스의 고봉 7기가 지나가는 척박한 환경의 볼리비아. 과거는 식민시대의 무자비한 수탈을 겪었고, 독립 이후에는 주변국가들과 자원, 국경 분쟁을 거치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던 가난한 나라. 아픔의 역사다.
◇ 첫번째 아픔 '식민시대, 은광의 저주'
16세기 중반. 포토시에 발견된 세계 최대의 은광은 스페인에겐 대박이었지만, 수탈에 동원된 원주민에겐 죽음의 광산이었다. 은맥 발견 초기 4800m 세로 리코산은 함유율이 40%가 넘는 노다지였다. 스페인 식민자들이 신대륙에게 애타게 찾던 바로 그 황금향, 엘도라도였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해발 4090m 고원의 포토시는 인구 20만명이 넘는 도시로 번창했다. 당시 런던의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하니, 은광이 만들어낸 포토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아마도 1970년대 강원도 태백시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태백에서는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로, 포토시에서도 개가 은전을 물고 다녔다고 한다.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은 라마에 실려 리마로 옮겨졌다. 은은 리마 항구를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식민지에서 유입된 은은 스페인을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고, 전제 군주의 사치와 전쟁을 위한 재원이 됐다.
쉽게 채굴할 수 있는 은광이 고갈되면서 채굴 환경은 점차 나빠져 채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하 수백m까지 내려가야 하는 열악한 채광 환경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원주민들은 코카 잎을 씹으며 견뎌야 했다. 수은을 이용한 순은 분리방식이 도입되면서 수은 중독, 진폐증으로 광부들이 죽어나갔다. 당시 800만명의 원주민들이 죽었다니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1825년 볼리비아가 독립할 무렵 광산은 거의 고갈됐고, 포토시는 버려진 도시로 전락했다. 고산 속 저지대 분지에 만든 배후 도시 라파스는 땅도, 산소도 부족한 이름뿐인 평화의 도시로 남았다.
막대한 부를 제공한 포토시 은광산이 스페인에는 끝까지 행운이었을까?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수탈해온 부로 타국의 값싼 제품을 수입하면서 풍족한 삶을 누렸기에 굳이 제조업을 키워낼 필요성을 못 느꼈다. 군주는 넘치는 부로 사치에 빠져들었고, 애국심 없는 용병을 활용한 전쟁은 승리보다 군비만 축냈다. 화수분은 소설에만 등장한다. 포토시 은의 채산성이 나빠지면서 돈줄은 막히자 스페인 경제는 자원의 저주에 빠졌다. 그 결과 스페인은 유럽 내 고만고만한 나라로 전락했다. 포토시의 은은 스페인, 인도, 필리핀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가고 은본위제를 채택한 중국의 아편전쟁 빌미가 된다.
◇ 두번째 아픔 '내륙국가로의 전락'
스페인에서 독립할 당시만 해도 볼리비아는 태평양쪽 아타카파 사막에 안토파가스타라는 항구도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화약의 원료인 초석 그리고 비료의 원료인 구아노와 같은 광물이 풍부한 땅이었다. 볼리비아는 부족한 기술력을 채우기 위해 무과세로 칠레의 기업을 상주시키며 자원을 개발하도록 하고 이익을 나눴다. 빼앗길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까? 볼리비아는 이 지역 기업들의 자산을 압류하자, 자국 기업을 지키기 위해 칠레 정부가 이를 막아섰다.
1879년 칠레군이 안토파가스타주를 강점했다. 그러자 볼리비아는 해군력을 보유한 형제국 페루와 군사동맹을 맺고 칠레와 전쟁에 나서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막강한 칠레 해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해전에 이어 지상전까지 참패한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뿐만 아니라 페루의 아리카주까지 빼앗기며, 1883년 종전에 이른다.
볼리비아는 스스로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막대한 광물자원의 보고를 잃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을 칠레에 빼앗김으로써 태평양으로 나갈 항구를 잃어버리고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 세번째 아픔 '파라과이와의 전쟁 패배'
항구를 빼앗긴 볼리비아는 이후 일부지역 영유권 반환이나 항만 사용권이라도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칠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칠레는 페루에게 빼앗은 타크나 지역 등 태평양의 일부 연안지역은 페루에 돌려줬지만 자원 가치가 높은 안토파가스타는 돌려주지 않았다.
태평양으로 가는 출구를 잃은 볼리비아는 라플라타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가는 출구를 생각하게 된다. 볼리비아 우측에는 파라과이 국경 사이에 그란차코(Gran Chaco)라는 황무지가 있었다. 밀림과 늪 지대인 이곳은 과라니족들이 숨어사는 지역이고 파라과이도 사실상 버린 땅이었다. 대서양으로 가는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란 차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 즈음, 이 지역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소식이 터졌다.
그러자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가 1928년 전쟁을 했다. 사실 파라과이는 1870년 끝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의 3국 전쟁에서 패하면서 국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인구나 병력면에서 볼리비아가 압도적 우세였다. 하지만 징집된 인디언들로 구성된 볼리비아군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파라과이군을 대적하기엔 사기가 너무 떨어져 있었고, 건조한 고원지역이 익숙한 볼리비아군에게 저지대 습한 토양은 또다른 복병이었다.
결국 두 나라의 전쟁은 주변국의 중재로 끝났다. 볼리비아는 대서양에 접근할 수 있는 파라과이 강 지역을 이용할 수 있게 됐지만 잃은 게 너무 많았다. 이에 비해 파라과이는 그린 차코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3국 전쟁의 패배로 잃은 국토를 이 전쟁으로 새로 확보한 셈이다. 미국계의 스탠더드 오일사와 로얄더치셀사의 석유탐사 이권에 의해 촉발된 전쟁이기도 해서 그란차코 전쟁이란 이름대신에 석유전쟁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데 결론적으로 이 지역에는 석유가 없었다.
◇ 남미의 빈국, 볼리비아에 희망이 있을까?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은광이라는 축복받아야 할 지하자원은 원주민들에게 강제노역의 고통과 수은 중독이라는 저주였다. 칠레로부터 자원을 지키려던 욕심은 태평양 출구를 잃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고, 대서양 수로개척 노력은 그린차코 지역의 4분의 3을 파라과이에 내주는 결과를 낳았다.
볼리비아는 잉카문명의 발상지인데도 잉카의 영광과 스토리는 페루가 다 차지했다. 독립 후 180년동안 64명의 대통령이 나오고, 200여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나 세계 최대 정변발생국이라는 불명예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결국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베네수엘라와 함께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전쟁에서 번번이 지고, 돈도 없는 이 비운의 나라에게 희망이 있을까?
이런 환경에서도 행복지수가 낮지 않다는 것은 이들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뭘까? 잉카 이전부터 존재하는 창조의 신 비라코차, 대지의 어머니 파차마마가 기반인 안데스 토속신앙의 힘이 아닐까 싶다. 기본품성이 착한 안데스 사람들은 케추어로 아마스아(도둑질 하지 마라), 아마유아(거짓말 하지 마라), 아마케야(게으르지 마라)라는 불문율을 품고 산다고 한다.
높은 산봉우리마다 영이 있다 믿으며, 큰 일, 사업을 벌일 때는 반드시 파차마마에게 일에 걸맞은 공물을 먼저 바치고 무사고나 안녕을 기원한다. 제물을 파는 마녀시장이 필요한 이유다. 정복자들도 이들을 신앙을 가톨릭에 수용하기 위해 대성당 벽면 부조에 그들의 신들을 새겨넣었다. 일부 토착민은 파차마마를 아마존의 성모님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 그래도 희망은 있다
신헌법에 지구의 생존권리, 자연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고 ESG를 외치는 나라가 많지만 어느 나라도 흉내내지 못할 자신들의 가치를 공유했다. 아이마라 원주민 출신의 모랄레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원주민들의 상징인 7색깔 위팔라를 또다른 국기로 인정한다.
5겹의 치마 포제라를 입고, 중절모를 쓰고 아구아요에 무거운 등짐을 맨 볼리비아 여성, 촐리타들의 든든한 허리와 발목, 전통과 토속을 지키는 힘 그리고 억척스러움에서 희망이 보인다.
대통령궁 앞의 꺼꾸로 가는 시계는 유럽중심의 세계관에 굴하지 않는 볼리비아인들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듯하고, 2024년 대통령궁을 진입한 군부 쿠데타 시도를 시민들이 시위로 막아서는 선진화된 의식은 이제 최대 정변발생국가라는 불명예를 지울 수 있지 않을까?
현대식 텔레펠리코는 고산 분지 도시라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할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해된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세계 2위 수준의 천연가스, 석유, 구리와 같은 천연 자원 그리고 우유니 사막에 매장된 세계 최대의 리튬의 효율적 생산과 수출의 길을 열수 있으리라.
태평양 쪽 항구를 잃었고, 대서양 쪽 수로 개척도 실패했지만 볼리비아는 5000명이 넘는 해군과 해병대가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마지막 결사항전하던 에두아르도가 죽은 3월 23일을 바다의 날로 정해 추모한다. 티티카카호 주변과 아마존 밀림내 강에서 해군 훈련을 하며 해양국 지휘회복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기회는 있는 법이다.
외곽에 공터를 마련하고 돈을 버는 대로 벽돌을 조금씩 사서 모으고, 또 돈을 벌어 1층을 짓는다. 언제가 될지 모를 이층을 위해 기둥 철근만 올려진 집들을 보며 볼리비아 서민들에게서 '중꺾마'를 읽는다.
라파스를 떠나는 날.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라파스와 엘알토 뒤에 우뚝 선 안데스 설산이 한눈에 보였다. 해발 6438m 일리마니산이다. 라파스에 머무는 사흘동안 드러내지 않던 정체를 떠나는 날 드러냈다. 볼리비아인들의 든든한 '빽'인 토착신앙 근거지이자 그들이 키우는 희망의 기반이다. 저 산 어딘가에 볼리비아 원주민 그리고 촐리타들이 모시는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가 볼리비아인들이 흘린 눈물과 그들이 키워가는 희망을 모두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