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년 여행노트] 볼리비아의 아픔 그리고 희망
2024-12-09
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제20편 [꽃중년 여행노트]볼리비아의 아픔 그리고 희망>편에서 이어집니다.
남미여행은 긴 이동거리를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에 달렸다. 한달 가까운 여행기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남미의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봐야 하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긴 일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일정이 빠듯해서 몸이 고단하다.
우리가 볼리비아를 떠나 여행의 마지막 국가인 '페루'로 이동하는 날도 그랬다. 숨쉬기도 어려운 높은 고도의 도시 '라파스'를 떠나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정도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라파스를 떠나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 내에 있는 '우루밤바'라는 마을까지 하룻만에 갔으니 말이다.
◇ 볼리비아를 떠나는 날
우리는 페루 쿠스코로 가기 위해 새벽 3시30분에 라파스의 까미노호텔을 출발했다. 오전 5시4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조식으로 마련된 도시락 들고 전용버스에 탑승했다. 해발 3300m 라파스를 떠나는 날, 은하수처럼 떠있는 라파스 언덕마을의 불빛을 뒤로 하고 4100m 높이에 있는 엘알토공항에 도착했다. 며칠간 라파스, 우유니 등 고지에서 지냈지만 4100m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우리는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거쳐 쿠스코로 가야 했다. 직항이 없었다. 수하물을 부치고 출국절차까지 마치니 오전 5시가 조금 넘었다. 볼리비아는 남미에 있는 국가 가운데 출입국 절차가 가장 까다롭다. 남미 방문 5개국중에 유일하게 비자가 필요한 나라여서 국내 출국전에 발급받아야 했다. 며칠전 칠레에서 입국할 때도 식물이나 과일 등 금지된 식품류 반입을 철저히 체크했었다. 출국하는데도 넘어야 할 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는 출국 절차를 마치고 출국 게이트 앞 커피점에서 주문한 커피 한잔을 받아들고 도시락에 든 샌드위치와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그런 다음 페루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티켓을 체크하는 탑승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런데 비행기 탑승직전 갑자기 승객들을 한줄로 세우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짐을 바닥에 내리게 하고 옆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순간, 제복입은 군인들이 위압적인 자세로 물러서게 한뒤 함께 온 커다란 개로 하여금 짐을 하나씩 탐지하도록 했다. 마약 소지여부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마약을 탐지하는 시간은 길지 않아서 비행기는 오전 6시에 이륙했다. 비행기 창밖으로 라파스 시내의 붉은 지붕들이 점점 멀어져 갔고, 그 끝에 하얀 설산이 보였다. 바로 '알리마니' 설산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짠한 마음이 들었던 볼리비아를 떠나왔다.
◇ 남미여행 또하나의 변수 '수하물 안전'
이번 여행에서 16편의 항공으로 이동했다. 대한항공이 2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미 항공편이었다. 남미 항공편 가운데 10편이 라탐항공(LA)이었다. 볼리비아에서 리마로 이동할 때도 우리는 라탐항공을 탔다.
내가 쓰는 남미 여행기 첫편에서 밝혔듯이 남미여행의 4가지 변수는 치안, 고산 적응, 건강유지, 날씨다. 여기서 하나를 더 보태자면 바로 항공기에 실은 수하물의 안전한 도착이다.
남미가 워낙 넓다보니 국가간 이동뿐 아니라 같은 나라에서도 비행기로 자주 이용하게 된다. 남미 로컬 항공사들의 수하물 처리방법이나 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항공사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다보니 예상치도 못한 여러가지 상황들이 발생할 수 있다.
우선 수하물이 제때 도착하느냐다. 리우에 도착하던 날부터 이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우리는 영국 런던공항에서 라탐항공을 타고 상파울로공항을 경유해 14시간만에 리우공항에 도착했다. 여자 일행 한분의 트렁크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1시간30분동안 공항에 대기했다. 결국 그 수하물은 이틀이 지난 뒤 우리가 묵는 호텔로 도착했다. 며칠 후 부에노스아이레스공항에서 우수아이아로 가는 아르헨티나항공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비책은 없다. 그냥 수하물이 무사히 당도하기를 비는 수밖에. 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최소한의 옷가지나 물품을 기내용 캐리어에 챙겨야 한다.
두번째는 수하물로 부친 트렁크의 파손 가능성이다. 트렁크를 비행기에 싣거나 내리는 과정에서 주로 파손된다. 거칠게 다루기 때문이다. 우연히 공항 라운지에서 출발 대기중인 어느 항공기에 수하물을 싣는 과정을 봤는데 마구 던지고 있었다. 10차례가 넘는 비행기 이동과정에서 트렁크는 그렇게 던져졌을 것이다. 그만큼 파손 가능성도 커진다.
항공사에 파손된 수하물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수 있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가장 곤란한 문제는 바퀴 파손이다. 버스로, 호텔로 이동할 때마다 20kg가 넘는 트렁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 트렁크 바퀴가 파손돼 고생하는 일행을 봤다.
세번째로 수하물 내용물의 분실 가능성이다. 우수아이아공항에서 칼라파테공항으로 가는 날이었다. 아르헨티나항공인 AR사는 대한항공과 같은 스카이팀(skyteam)이라서 나는 비즈니스 창구에서 티케팅 및 수하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칼라파테공항의 도착 수하물 컨베이어벨트에서 'Priority' 딱지가 붙은 내 트렁크의 도착이 가장 늦었다. 이상했다. 호텔에 가서 트렁크를 열어보니 안에 넣어둔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다. 다행히 분실된 것은 없었다. 누군가 내 가방을 뒤진게 분명했다. 팁을 주기 위해 소액권으로 30~40달러를 트렁크에 넣어뒀는데 그 봉투가 없어졌다는 일행도 있었다.
네번째는 항공사마다 수하물 무게 규정이 제각각이다. 라탐항공(LA)은 이코노미 기준으로 1인당 23kg인데 볼리비아항공(OB)은 20kg이고, 아르헨티나항공(AR)은 15kg였다. 여러 항공사를 이용해야 하니 그중 가장 낮은 기준인 15kg에 맞추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4계절을 대비한 한달이나 되는 여행 일정에 이 기준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수kg이 넘는 짐을 저울에 올리고 그때그때마다 다른 요금 부과 원칙을 적용하는 항공사 직원의 눈치를 보고 그에 맞춘 임기응변이 답이다.
거의 매일 이동하는 긴 여행에 이런 문제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마땅해 보이지 않는다. 지연 도착을 고려해서 여분의 옷가지 한 두 벌은 탑승할 짐에 넣어 두어야 하고, 튼튼한 트렁크를 준비하고 수하물에는 절대 금품은 넣어두지 말아야 한다.
◇ 잉카의 나라 페루에 도착
마약점검을 받느라 1시간 늦게 출발했지만, 1시간 30분만에 우리는 리마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8시30분쯤 됐다. 무엇보다 숨쉬기가 편해졌다. 해안도시 '리마'의 고도는 거의 0m다. 리마를 거쳐 고도 3000m가 넘는 고산도시 '쿠스코'로 다시 이동해야 했지만 그래도 편히 숨쉬는 게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리마의 날씨는 라파스보다 더웠다. 새벽에 입고 온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 4시간에 가까운 환승 대기 시간은 모자란 잠으로 채웠다. 졸다 깨서 돌아다니다보니 스타벅스 커피점이 보였다. 여행한지 20일만에 처음으로 만난 스타벅스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잠을 깨우고 오전 11시 45분 쿠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시간 20분만에 도착한 쿠스코. 다시 3400m 도시였다. 리마공항에서 보지못한 잉카의 유물 그리고 마추픽추 유적 그림을 보며 페루에 왔음을 실감했다. 그런데 공항 밖으로 보이는 붉은 지붕의 집들과 불편한 숨쉬기를 겪으니 마치 라파스에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도 라파스, 우유니를 거치며 고산 분위기를 겪어서 그런지 견딜만했다. 우리는 미니버스 수준의 버스를 타고 쿠스코 시내의 좁디좁은 도로와 오르막을 올랐다.
미니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300m 정도 걸어서 아르마스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 도착했다. 식사 중 페루 전통복장에 팬 플루트를 포함한 전통악기를 든 공연팀이 연주를 했다. 남미여행 내내 듣는 '엘콘도 파사' 연주도 나왔다. 식당에 소속된 연주팀은 아니고 관광객 그룹이 들어오면 따라와 식사중에 연주를 하고 팁을 받는 식이었다.
비에 젖은 아르마스 광장을 내려다보며 간장조림 등심볶음밥을 먹으며 연주를 감상했다. 창밖 풍경은 마치 유럽의 어느 오래된 도시 같았다. 웅장한 붉은 색의 대성당이 보이고 파란 잔디가 깔린 넓은 광장 가장자리에 예쁜 꽃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장 가운데 설치된 큼직한 분수는 쉴새없이 물을 뿜고 있다. 오가는 시민들도 편안해 보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여정으로 쌓인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미니버스에 올랐다. 오후 3시였다. 숙소가 있는 우르밤바호텔로 이동하는 도중에 잉카 유적지 몇군데를 들르기로 했다. 쿠스코 일정을 함께 할 가이드는 현지인과 결혼한 한국인이었다. 마치 약장수처럼 청산유수였다. 남미여행 패키지의 경우 한국에서 일정 전체를 챙기는 인솔자가 동행하고, 현지에서도 국가별로 한국인 가이드가 함께 한다. 일정에 따라 보조할 지역 현지인 가이드도 1~2명 함께 한다.
페루 여행의 주 목적은 잉카유적지 방문이다. 잉카문명은 13세기 초에 시작됐는데, 전성기에는 북으로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남으로 칠레 산티아고 지역까지 5800km이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거느렸다. 수도가 쿠스코였다
우르밤바 마을로 가는 길에 우리는 '성스러운 유적지'에 있는 모레이(Moray) 유적지에 들렀다. 소위 잉카인들의 농업시험소다. 계곡 아래 넓은 동심원 형태의 계단식 밭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마치 원형경기장 같았다. 수풀에 덮혀 있었던 이곳은 1932년 항공촬영 중 발견됐다. 눈앞에 보이는 2개 말고 2개의 동심원 밭이 더 있다고 한다. 1.5m~2m 높이의 계단에 따른 온도차를 고려한 작물의 품종 개량을 연구했다. 따뜻한 저지대에서 가져온 농산물의 고산 적응 시험도 여기서 했다고 한다. 아래는 옥수수, 위는 감자를 심었다. 감자 품종이 4000종이나 된다니 놀라웠다.
우리는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잉카인의 소금염전 유적인 '살리네라스'로 달렸다. 가는 도중에 100마리는 넘는 양떼를 만났다. 건너편에서 오던 차량들도 멈춰서서 양떼들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좁은 길을 차량도, 사람도, 양떼도 나눠 쓴다. 양몰이 검둥개는 파타고니아에서 봤었는데 여기서도 열일을 했다.
메인 도로에서 계곡 아래에 있는 소금밭은 고도가 400m 정도로 낮다. 좁은 내리막 비탈을 구불구불 내려가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소금물을 작은 계단식 밭에 고이게 하고, 강렬한 태양이 물을 증발시키면 소금이 추출된다. 황토색 계곡 비탈에서 아래까지 흰색에서 갈색으로 보이는 소금밭이 3000개나 된다고 한다. 크고 작은 계단식 밭이 마치 남해에서 본 다랭이 논같았다. 안데스산맥이 수만년 전에는 바다 밑이었고 융기되면서 고산지대가 됐다. 토양에 남은 염분이 계곡으로 흘러내리던 빙하수를 만나 녹아내리며 짠물이 되고 잉카인이 염전으로 개발한 것이다. 아직 여기서 소금을 채취한다 하니 유적이라고만 보기가 어려울 듯하다.
우르밤바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넘었다. 방 배정보다 저녁식사가 우선이다. 이 동네 명물이라는 송어 스테이크로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고 바로 방으로 직행했다. 샤워를 하고 베란다 창문을 여니 1층이라 바로 정원과 연결돼 있었다. 어둠 속이지만 짙은 향이 느껴진다. 오렌지 자스민 나무의 하얀 꽃들이 불빛에도 선명했다.
새벽 2시 30분부터 시작된 이날의 여정이 이렇게 끝났다. 18시간 30분을 꼬박 이동한 긴 하루였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