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년 여행노트] '색다른 맛'...남미의 특별한 먹거리들
2025-01-20
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제23편[꽃중년 여행노트]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에서 이어집니다.
남미 5개국의 마지막 여행지 '쿠스코'는 잉카 대제국의 옛 수도이자, 쿠스코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다. 볼거리는 참 많지만 해발 3400m가 넘는 고산지역인 탓에 숨쉬기가 편하지 않았다.
우리는 쿠스코에서 이틀 그리고 리마에서 이틀을 보냈다. 원래는 쿠스코 외곽에 있는 해발 5000m가 조금 넘는 무지개산 비니쿤카(Vinicunca)를 갈 예정이었지만 고산증에 대한 우려로 포기했다. 대신 쿠스코 시내와 외곽의 잉카 유적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쿠스코 첫날 우리는 코리칸차 신전을 허물고 건설한 산토도밍고 성당과 외곽의 탐보마차이, 켄코 유적과 잉카의 마지막 항전지인 삭사이와만을 둘러봤다.
◇ 산토도밍고 성당이 된 '코리칸차' 신전
잉카제국의 태양신 '인티'(Inti)는 현세계를 관장하는 신으로, 농산물의 번성과 제국 보호를 담당한다. 잉카의 황제가 바로 태양신의 아들이다. 그래서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인 코리칸차(Qorikancha)는 퓨마 모양의 쿠스코 지역에서도 가장 중요한 머리 부분에 세워졌다.
제국을 지켜주는 잉카의 심장과도 같은 이 신전을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잉카의 번영을 상징하듯 화려하게 꾸며진 신전의 황금을 다 챙기고 건물은 허물었다. 워낙 견고하게 쌓은 건물이라 석벽 기초는 다 허물지 못하고 그 기초 위에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다. 바로 지금의 산토도밍고 성당이다.
황금정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코리칸차 신전에는 외벽 상단에 20cm의 금띠가 둘려져 있다. 문과 지붕은 2kg의 순금 벽돌로 장식했는데 무려 700여장이었다고 한다. 정원에는 황금으로 된 신상 외에 동물, 식물 모형이 있었다. 그야말로 태양의 색깔 황금 신전이었다.
피사로가 포로로 잡은 황제 아타우알파를 석방해주는 조건으로 받은 금과 은의 상당부분이 이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형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리마로 떠난 후 남아있던 동생 후안 피사로는 나머지 황금을 모조리 챙겼다. 코리칸차의 황금판을 다 떼어내고, 황금 유물들을 모두 쓸어다가 주물로 녹여 황금덩어리로 만든 후 스페인으로 실어날랐다. 녹여 없애지 않고 원형 그대로 가져가 문화재로 보존했으면 당시 잉카 황제의 생활이나 제사 문화도 알 수 있고, 가치도 그 이상이었을텐데.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국가차원의 식민정책이 아닌, 특정 귀족의 역량에 맡겨 식민지를 약탈했던 당시 스페인 식민정책 수준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성당 앞에는 2개의 문이 있다. 오른쪽은 성당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왼쪽은 신전 관광을 위한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가운데 중정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회랑이 눈에 들어왔다. 중정 한가운데는 팔면체의 돌 상자로 된 우물이 있는데 이를 열린 배꼽의 돌이라고 했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4개 지역으로 구성된 잉카 대제국 타우완틴수유의 배꼽, 즉 그 중심을 표시한다고 한다.
회랑 벽에는 벽화가 길게 걸려 있는데 성당과 수도원을 건설한 도미니카 수도회에서 제작한 가톨릭 사제들의 생활상과 쿠스코 화가들이 작품이다. 회랑 안쪽으로 태양의 신전 외에 무지개, 달, 별등의 다양한 신전과 사제들이 사용한 방의 일부가 남아있다. 이 공간에 유적을 모아두고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정교한 건축기술과 화려한 신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잉카인들은 돌을 쌓을 때 레고 블럭처럼 암돌과 숫돌의 형태로 홈을 파서 결합하고 돌 사이를 청동 주물을 이용해 빈틈이 생기지 않게 쌓았다. 벽은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지게 만들어 바닥이 천정보다 넓게 만들고, 창문이나 벽도 아래쪽이 더 넓은 등변 사다리꼴 형태로 만들었다. 완벽한 벽돌의 연결과 안정된 건축 구조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석벽이 됐다. 실제로 1610년 완공된 산토도밍고 성당은 1650년 진도 7.7에 이르는 쿠스코 대지진 때 다 무너졌지만 기초석은 멀쩡했다. 그 위에 다시 세운 성당 건물은 1950년 지진에도 버텼다.
무지개 신을 모신 방에 난 창문은 옆에 붙은 다른 2개 방의 창문과 일렬로 배치해서 바깥에서 태양 빛이 들어올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신전 벽에 창문 형태이나 뒤가 막힌 벽감이 여러개 있었는데 이 공간은 황금신상을 모시거나 제물을 올린 공간이다. 모두 떼어가고, 훔쳐가 주물로 녹여버려서 지금은 형체가 없어졌지만 황금판 등 일부 남은 유물로 잉카제국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태양의 제국답게 태양의 색과 가장 닮은 황금으로 신상, 동물, 식물 모형을 만들었다. 코리칸차의 별지도라고 하는 황금판이 남아있다. 여기에는 은하수와 함께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 달, 별들이 그려져 있고, 그외 무지개, 천둥, 물 등도 새겨져 있다.
전시공간을 빠져나오니 아래쪽 넓은 광장이 초원처럼 펼쳐져 있다. 햇살을 즐기며 편히 쉬기 좋은 이 광장이 사그라도 정원인데 쿠스코 최대의 축제인 태양제가 열리는 곳이다. 태양제(Inti Raymi) 축제는 잉카 시계로 새해 첫날이자, 남반구의 동지날인 매월 6월 24일부터 열린다.
개막식과 4개 부족이 원색의 의상을 입고 벌이는 퍼레이드는 사그라도 광장에서 첫날 열리고, 본 행사는 삭사이와만에서 9일동안를 진행된다. 전국에서 10만명 이상 참석한다고 한다. 이 정원 지하에 코리칸차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모아둔 박물관이 있다. 전성기 시대 대잉카제국의 영토, 뇌수술을 받은 두개골, 미라 등을 볼 수 있다. 여기 모아둔 것들도 대부분 모조품이라고 한다.
◇ 잉카인의 마지막 저항 요새 '삭사이와만'
삭사이와만(Saqsaywaman)은 쿠스코 동쪽을 방어하기 위해 해발 3555m에 설치한 요새다. 퓨마의 형상을 한 쿠스코에서 퓨마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다. 고대 사원, 미라를 보관한 것으로 보이는 방도 발견돼 요새이면서 종교의식을 행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22번이나 지그재그로 굽어지는 3단 석벽이 300m에 이를 만큼 긴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석벽에는 수십에서 수백kg에 이르는 거석들이 즐비하다.
마차도 철기도 없던 시절에 잉카인들은 이 거대한 암석을 어디에서 어떻게 옮기고 또 어떻게 쌓았을까? 하지만 이 요새도 철기와 말을 앞세운 스페인 점령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잉카전사들이 이 요새에서 쿠스코를 되찾기 위해 스페인군과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마지막 항전 때에 3000여명의 잉카군인들이 이 요새 안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엄청나게 많은 시신이 버려져 방치되는 바람에 독수리가 포식을 해서 잘 날지 못했다고 하니, 잉카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항전의 처절함을 알만했다.
원래 3단으로 돼 있지만 스페인 식민시대에 이 석재들을 뜯어 성당이나 건물을 지었다. 코리칸차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지은 산토도밍고 성당이나쿠스코 대성당도 이곳의 돌이 사용됐다. 지금은 1, 2단 석벽으로 20% 정도만 남아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정교함에 놀라며 석벽을 돌아 언덕을 오르니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 곳곳에서 예상못한 보라색 야생들꽃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리스, 즉 붓꽃이다. 양재천변에서 5월쯤 보던 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라색 화피 3개의 끝이 노란색인데 마치 황금덩어리를 올려놓은 것같다. 크기도 유럽의 붓꽃처럼 크고 화려하지 않다. 야생들꽃처럼 키도 작고 수수하고 깨끗하다. 태양의 제국 잉카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잉카군의 혼이 야생 붓꽃으로 피어난 게 아닐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붉은 지붕이 빼곡한 쿠스코 시내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시내를 받치고 있는 뒷산 중턱에 새겨진 큼직한 글씨도 눈에 들어왔다. 'VIVA EL PERU'. 그 옆에 페루 국기에 새겨진 문양이 보였다. 15세기 삭사이와만에서 죽어간 잉카군의 함성일 것이고, 다시 잉카의 정신을 찾고 있는 현재 쿠스코 사람들의 외침일 것이다.
◇ 쿠스코 외곽의 탐보마차이와 켄코 유적
탐보마차이(Tambomachay)는 쿠스코 근교 유적인데, 사계절 내내 같은 양의 물이 흐르는 성스러운 샘이라고 불린다. 잉카인들의 돌 쌓는 기술은 돌담을 쌓는 데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수로를 만드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고원 산속에서 계단식 밭을 만들고 농사를 짓기 위한 농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식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수로가 필요했다. 그 외 성스러운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을 하기 위해서도 맑은 물이 필요했다. 탐보마차이는 잉카인들이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을 하던 샘터로 알려진 유적이다. 여기서도 정교하게 쌓은 석벽, 석벽 위에 신상이나 제물을 올렸을 것으로 보이는 벽감이 보인다. 산 속에 흐르는 물을 수로를 통해 모으고, 다시 2단계의 낙차를 통해 아래로 떨어뜨려 샘터에 모이게 하는 시설이 남아있다. 지금도 그 수로를 따라 내려오는 물이 마르지않고 샘에 고이고 있어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켄코(Qenqo)는 미로라는 의미인데 잉카제국 왕족들의 장례식을 치렀던 유적이다. 거대한 바위들 사이로 사람이 드나드는 미로같은 통로가 있고 제물을 올렸던 바위 받침대도 남아 있다. 장례식장에 3단의 계단이 있는 바위가 있는데 지하에 잠들다가, 땅 밖으로 나와 하늘나라로 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장례와 제사뿐 아니라 길흉을 점치기도 했고 인신공양, 즉 살아있는 아이를 제물로 바치기도 한 장소라고 한다. 바위 위에 산채 바쳐진 제물의 피가 흘러내리는 홈이 파져 있는데 피의 흐르는 형태를 보고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미로를 빠져나와 언덕에 오르니 쿠스코 시내가 다 보인다. 장례식장이란 어두운 면보다 전망 좋은 언덕같다.
◇ 잉카제국은 어떻게 멸망했나
차이가 크게 나는 문명간의 충돌에서 한 문명의 몰락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거대제국 잉카의 몰락 과정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쿠스코 그리고 잉카 유적을 돌아보며 궁금했던 잉카제국의 몰락을 정리해본다.
북미에서 아즈텍을 정복하고 거부가 된 에르난 아르테스를 롤모델로 생각한 야심가 프란치스코 피사로는 남미에서 황금의 나라를 찾을 꿈을 꾼다. 파나마에서 기회를 노리던 그는 1530년 형제 친척 중심의 식민 원정대를 조직하고 스페인 왕의 허락을 얻는다. 남미로 내려와 식민지를 개척하던 그는 마침내 기회의 땅 잉카제국으로 들어간다. 1532년 6월, 우연히 잉카의 5대 황제 아타우알파를 만나게 되는 절호의 기회를 갖는다.
168명의 피사로 일행과 7000명이 넘는 잉카군의 보호를 받는 황제와의 알현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역사의 변곡점이 된다. 선교사가 건넨 성경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황제는 성경을 발 아래로 던졌고, 이를 신호처럼 스페인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숫자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수준이지만 괴물같은 말을 타고 철갑을 입은 62명의 기병대 그리고 천둥소리를 내는 대포와 총, 강철로 된 칼을 가진 훈련된 보병 106명의 기습공격이었다. 비무장이거나 겨우 돌도끼, 나무 곤봉 정도를 든 잉카군이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지명을 따서 카하마르카 전투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한나절 전투에 수천명이 죽고 천둥같은 총소리와 날뛰는 말에 놀라 나머지는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사실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라고 부르는 스페인 식민 정복자들의 무기나 전투력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민족인 무어족을 몰아내는 800년에 이르는 긴 국토회복운동(리콩키스타)이 1492년에 완성됐다. 이 전쟁을 치르며 키워진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스페인 군인들은 더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 이들이 콩키스타도르라는 이름으로 바꿔 찾아나선 다음 전쟁터가 남미였다. 명분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전파였다.
포로가 된 황제는 피사로가 황금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갇힌 방을 금과 은으로 채워주는 조건으로 석방을 협상한다. 10평 남짓한 방은 순식간에 전국에서 모아온 금은 장신구로 채워졌다. 금이 7톤, 은이 12톤이니 됐다고 하니 현시세로 따지면 1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후환이 두려운 피사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황제를 처형한다.
쿠스코에 입성한 피사로 일행은 망코 잉카를 황제로 세우고 식민 정책을 진행하며 더 많은 황금을 주물로 녹여 본국으로 보낸다. 정복자들의 행패를 보고 본심을 알게 된 망코 잉카는 쿠스코를 탈출한다. 20만 잉카군을 모아 삭사이와만 요새에서 쿠스코를 점령한 정복자에 대항한다. 오얀따이땀보에서의 마지막 항전마저 실패한 황제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 빌카밤바(Vilcabamba)에 신잉카제국을 세우고 저항운동을 이어간다. 이마저 1571년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르가 체포되고 처형됨으로써 잉카제국은 역사에서 막을 내린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인간 사회의 운명을 바꾼 힘으로 '총, 균, 쇠'를 들고 있다. 아타우알파와 피사로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잉카제국의 멸망도 총, 쇠뿐 아니라 균이라는 요소를 빠트릴 수 없다. 천둥소리를 내는 대포와 총을 구석기시대 수준의 돌도끼나 나무 곤봉으로 이겨낼 수가 없고 강철 검, 철 갑옷과 같은 철기 문화에 말을 탄 스페인 정복자들을 알파카 털로 짠 옷을 입은 잉카인이 이겨낼 수 없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정복자들이 우연히 몸에 지내고 온 천연두나 티프스 등 질병, 균의 위력이었다. 파차쿠티 이후에 잉카제국의 최전성기를 만든 아타우알파의 아버지인 우아나카탁 그리고 후계자로 지목됐던 형을 포함해 많은 왕족들이 천연두로 사망한다. 치열한 내란 끝에 아타우알파가 왕권을 잡았을 때 이미 10만명이 넘는 잉카인들이 천연두로 사망한 후였다 이 시기에 잉카로 들어온 피사로 일행과 제대로 전쟁을 치르기는 어려운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 피사로 형제들의 운명은?
잉카인들은 치명적인 천연두 감염에 걸리면서 피사로 형제들은 잉카제국을 손에 넣고 꿈꾸던 황금을 얻었다. 이후 피사로 형제들에게는 행복한 미래가 보장됐을까? 결론을 먼저 말하면 그러지 못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만든 원정대에는 에르난도, 후안, 곤살로라는 3명의 동생이 있었다. 쿠스코를 점령한 피사로는 망코 잉카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리마에 와서 식민도시 건설에 몰두했다. 쿠스코에 남은 막내 곤살로 피사로는 망코 잉카 황제의 부인을 빼앗고, 황제 면전에 오줌을 갈기는 등 상식 이하의 패악질을 부린다. 분노한 황제는 쿠스코를 탈출해 20만 잉카 전사를 모으고 쿠스코 탈환을 시도한다.
칠레로 식민개척 떠난 피사로의 친구인 알마그로 일행은 험한 지형과 마푸체라는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원주민의 저항 등으로 칠레에서 큰 셩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들은 다시 북쪽으로 올라와 쿠스코로 들어왔고, 피사로 군대와 싸웠다. 알마그로는 전투에서 패해 피사로의 동생인 에르난도에게 처형당했다.
복수심에 불탄 알마그로 잔당은 3년 후 리마에 있는 피사로의 집을 습격해 피사로를 살해했다. 문맹에 사생아라는 악조건에서도 잉카를 정벌해 막대한 재산과, 후작이라는 지위까지 얻고 리마 건설에 몰두하던 피사로는 '고백'이라는 말만 남긴 채 숨을 거뒀다. 그는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리마 성당에 묻힌다. 그의 후손은 본인이 처형한 황제 아타우알파의 여동생인 키스페 시사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메스티조, 프란시스카 피사로 유판키라는 이름을 가진 딸 하나다.
셋째인 후안 피사로는 이전에 삭사이와만 전투에서 잉카군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고 죽었다. 막내인 곤살로는 큰형 피사로가 죽은 뒤 페루 총독 자리를 차지하려고 본국에 반항하다가 처형됐다. 둘째인 에르난도는 알마그로와의 내전 후 본국에 귀국했지만 체포돼 2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페루 정복의 일등공신인 피사로 4형제는 결국 암살, 감옥형, 전사, 처형이란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그러면 피사로 형제들이 벌어들린 엄청난 부는 어디로 갔을까? 피사로의 고명딸인 프란시스카는 옥살이하던 40살 연상의 삼촌 에르난도 피사로와 결혼한다. 이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재산을 지키고 후작가문의 정통성도 이어갔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피사로가 석방을 조건으로 10평 방이 가득 차도록 황금을 바친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처형한 이유 중 하나가 근친상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은 삼촌과 결혼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를 지켜낸 것이다. 혈통을 지키기 위해 여동생과 결혼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잉카의 황제는 죽을 죄가 되고, 문명국인 스페인 귀족들에게는 부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삼촌과 조카의 정략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은 셈이다.
프란치스코 피사로는 하늘에서 자신의 사후에 진행된 피사로 가문의 일들을 보고 있다면 웃었을까? 울었을까? 또 벌어들인 황금으로 당시 최고의 부국이 된 스페인, 그리고 다시 유럽의 고만고만한 나라로 전락한 지금의 스페인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내 결론은 사람들이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무리하는 일들이 다 허망하다는 것이다. 내 생각대로,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세상일이다. 그러나 피사로와 같은 야심가들의 열정이 만들어 낸 성취, 그리고 예상과는 다른 전개 등이 이어지면서 우리가 지금 읽는 역사가 만들어진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