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제25편[꽃중년 여행노트] 잉카제국 엿보기...코리칸자와 삭사이와만>에서 이어집니다.
◇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잉카 대제국의 옛 수도인 '쿠스코' 관광의 시작은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이다.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파차쿠티(Pachacuti) 황제의 금빛 동상이 서 있다. 파차쿠티는 잉카의 전성기를 만든 황제로 1438년 그의 재위부터 본격 잉카제국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4개 방향으로 뻗은 방대한 제국이라는 의미의 타완틴수유(Tawantinsuyu)라는 이름이 잉카제국의 공식 명칭이다. 위로 현재의 에콰도르 서부에서 페루를 거쳐 칠레 그리고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이르는 4000km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광할한 영토 통치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분열과 내전이 일어났고, 피사로 일가를 포함한 스페인 정복자들의 계략과 천연두의 확산으로 10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아르마스 광장은 잉카 제국시대에는 '전사의 광장' 즉 아우카이파타(Huacaypata)로 불렸으며, 축제와 의식을 행하던 장소였다. 전사의 광장 앞쪽에는 비라코차를 모시는 키스와르칸차라는 고대 잉카사원이 있다. 비라코차는 잉카 신화에서 최고의 신으로 우주와 태양, 달, 별, 시간을 만든 창조의 신이다. 태양신 '인티나' 달의 여신 '퀼라'도 그가 창조했다. 태양을 왕관으로 쓰고, 손에는 번개를 들고 흐르는 눈물이 비를 상징한다. 하얀 피부에 턱수염이 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잉카인들이 스페인 점령군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는 계기가 된 것으로 해석한다.
쿠스코를 손에 넣은 스페인 점령군은 잉카인의 정신적 상징인 신전을 성당으로 개조했다. 비라코차 신전 터에 1539년 승리 예배당(lglesia del Triunfo)을 세우고, 그 옆에 대성당을 세웠다. 1559년 짓기 시작한 대성당은 100년이 지난 1654년 완공됐는데 삭사이와만 요새에서 뜯어낸 석재들도 사용했다.
성당 건축에 동원된 잉카 인부들은 성당 정문에 잉카 신화에서 현실을 상징하는 퓨마 머리를 넣어 그들의 아픈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라파즈의 산프란시스코 대성당 벽에도 안데스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가 새겨진 벽돌이 있다. 원주민들을 달래고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허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스페인 식민시대 400년을 거치면서 가톨릭 신앙은 잉카의 후손인 케추어족과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파됐다. 인구 90%가 가톨릭 신자가 된 지금, 쿠스코 대성당은 시민들의 신앙적인 중심지가 됐다. 전사의 광장은 아르마스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쿠스코 문화와 생활, 관광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아르마스 광장은 스페인 식민시대에 세워진 건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 건물의 2층 발코니 아래를 주랑 형태의 통로로 만들면서 관광객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호객하는 전통복장을 입은 원주민들이 붐비는 거리가 됐다.
관광 중심지답게 기념품 가게 외에도 전통식당과 고급 레스토랑이 많고 알파카 털실로 만든 의류가게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린 알파카 털로 만든 화려한 색상의 스웨터가 걸린 가게들에 눈길이 갔다. 그래서 알파카 스웨터를 하나 구입했다. 그런데 진짜 명품 의류를 파는 곳은 따로 있었다. 비쿠냐(vicuna)라는 동물의 털로 짠 옷을 파는 곳들이었다. 우리는 'KUNA'라는 전문점에 들렀다. 알파카로 짠 의류보다 최소 10배는 더 비쌌다. 걸려있는 옷들의 가격은 수백만원 수준이었고 고급스럽게 전시된 코트의 가격표는 수천만원에 달했다. 눈으로만 즐기고 나왔다.
대성당 우측 건너편에는 잉카 황제의 궁전터에 세워진 라콤파니아 데 헤수스(La compania de jesus) 성당이 있다. 광장 한가운데는 거대한 분수대 위에는 파차쿠티 황제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은 왼손을 들고 있는데 그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면 반대편 산 정상에 세워진 하얀 예수상, 크리스토 블랑코(Christo Blanco)가 보인다.
이 예수상은 1945년 팔레스타인 기독교 난민들이 수용을 허용해준 쿠스코 시민에게 감사의 선물로 세운 것이다. 높이 8m의 하얀 예수상은 리우의 38m 높이의 예수상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쿠스코에서는 충분히 명물이다. 이곳은 쿠스코 시내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뷰포인트여서 밤이 되면 관광객들과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은 행사나 축제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지배자들의 의지를 알리는 곳으로도 활용이 된다. 빌카밤바에서 잉카 망명 제국을 세우고 마지막 저항을 하던 투팍 아마르(Tupac Amaru)가 붙잡혀 1572년 처형된 곳도 이 광장이다. 또 스페인 식민정부의 횡포에 저항해 신잉카제국 부활을 꿈꾸며 독립운동을 일으키다 체포된 투팍 아마르 2세가 1781년 거혈형을 당한 곳도 아르마스 광장이었다. 식민세력 반항에 대한 공개적이고 폭력적인 경고였다. 하지만 가치있는 죽음은 죽는다고 다 잊히는 것은 아니다.
투팍 아마르 2세의 얼굴과 4마리 말에 의해 사지가 잘려지는 모습은 잉카인들이 만드는 전통 카펫이나 직조물의 패턴으로 남아 잉카인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다. 그의 영혼이 콘도르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음을 확신하는 잉카인들은 엘콘도 파사라는 민요를 만들어 부르며 그를 아직도 추모하고 있다. 그의 저항 정신은 지금 활동하는 반정부 무장단체의 이름으로도 여전히 살아있고 태양을 의미하는 솔(sol)을 화폐단위로 사용하는 페루의 지폐(500솔)에도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 쿠스코 대성당과 12각돌
쿠스코 대성당은 부속건물로 왼쪽에 헤수스 마리아 예배당, 오른쪽에 승리 예배당을 끼고 있다. 규모면에서 유럽의 어느 성당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건물 중앙은 고딕식, 종루가 있는 양쪽 포탈은 르네상스식으로 건축됐다. 17세기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유럽식 건축물에 잉카의 문화까지 보태진 성당으로 남미 성당 중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힌다.
특히 300톤의 은을 이용해 정교하게 꾸며 화려함을 더한 주 제단이 유명하다. 그 제단 앞에 십자가상이 있는데 검은 얼굴에 안짱다리를 가진 예수님이 잉카의 고유의상인 치마를 입고 있다. 아마도 원주민인 잉카인들의 가톨릭 개종을 위해 현지화된 예수님이 모셔졌을 것이다.
이 검은 예수님은 또 지진의 신으로 유명세를 탄다. 1950년 쿠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시민들이 성모마리아에게 기도를 해도 지진이 멈추지 않았고, 스페인 수호성인 산티아고에게 기도를 해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대성당의 검은 예수님을 받쳐들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가자 지진이 멈췄다. 잉카인들이 지진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준 검은 예수님을 대지의 기운을 조정하는 지진의 신으로 믿고 더 숭배하는 계기가 됐다.
아르마스 광장을 떠나 성당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종교예술관으로 가는 로레타 돌담거리가 있다. 오른쪽에 잉카시대 쌓았던 아름다운 돌담이 있는데 그중에 12개면이 틈새없이 정교하게 주변의 돌과 연결된 돌이 있다. 소위 12각돌이다. 나는 이미 이틀동안 쿠스코 외곽을 돌며 잉카 유적지인 피삭, 오얀따이탐보와 마추픽추에서 정교하게 쌓은 석벽을 충분히 둘러봤다. 쿠스코 시내에서도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았던 코리칸자의 신전 벽, 최후의 저항지 삭사이와만 요새에서 거대한 돌담을 보며 잉카인들의 돌 쌓는 기술에 감탄했다.
그래도 잉카인의 석조기술의 정수는 바로 이 12각돌이 아닐까 싶다. 똑같은 크기로 돌을 잘라 붙이거나 쌓은 것이 아니라 원래 돌의 형태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 더 놀랍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돌을 있는 그대로 갈고 닦고 쌓아서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이어 붙인 신기에 가까운 재주를 12각돌에서 확인한다. 관광객들은 모두 이 돌을 찾아 12개 면을 일일이 세어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돌을 이어 쌓은 돌담에서 사람들은 퓨마나 독수리와 같은 형태를 찾아내기도 한다. 골목의 반대편 벽은 스페인 식민시대에 정복자들이 흉내내어 쌓은 돌담인데 잉카의 돌담과는 수준 차이가 많이 났다. 바닥에 깔린 돌도 마찬가지였다. 쿠스코 시내에서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바닥 돌은 모두 잉카 시대의 돌이고, 모양없이 울퉁불퉁하고 색이 칠해져 있는 돌은 스페인 식민시대의 돌이라고 보면 별로 틀리지 않는다.
이 골목에 '꽃보다 청춘'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온 기념품 가게 아순타(Asunta)가 있다. 가격도 싼 편이고 폰초(poncho)를 포함한 잉카 전통복장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 성지주일 대성당 미사와 검은 예수님
운좋게 부활주간 성지주일을 포함해 이틀에 걸쳐 쿠스코 대성당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색다른 경험을 정리해봤다.
패키지 일정의 마지막 날인 3월 24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8시에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쿠스코 관광을 하기로 돼 있었다. 그래서 오전 6시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하면 될듯해서 오전 5시40분에 호텔을 나섰다. 새벽길 치안에 대한 걱정과 달리 어둠이 걷혀 있어서 불안감도 사라졌다.
성당 가는 길은 생각과 달리 분주했다. 골목마다 나무줄기로 만든 장식을 쌓아놓고 팔았다. 알고보니 이날이 부활절 일주일전 일요일인 성지주일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이어서, 신자들이 성가지를 들고 흔들며 환영하는 가톨릭 의식이 있는 날이다. 성당에 들고 갈 종려나무 가지를 엮어 십자가 형태를 만들고, 예수님 사진을 붙인 것이 이 동네 방식의 성지이다. 국내에서는 성지주일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의식에 측백나무 가지를 흔든다.
오전 6시10분전. 성당 앞에 도착하니 성지를 파는 사람, 성지를 들고 성당 문 앞에 선 사람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전혀 예상못한 일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대성당 오른쪽으로 몰려갔다. 따라가보니 우측에 있는 부속성당인 승리 예배당의 문 앞에 수십명의 복사단이 열을 서 있고 성당 문 앞 강론대에 신부님이 서 계셨다. 강론을 마친 신부님은 복사단이 양쪽에서 밧줄을 들고 통제하며 만든 길을 따라 성수를 뿌리며 행진했다. 통로 양쪽에 빼곡하게 모여든 신자들은 성가지를 흔들었다. 소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의식이다.
입성 행사가 끝나고 대성당 정문이 열리자, 성지를 든 신자들이 성당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엄청난 인파였다. 휩쓸려 들어갔더니, 대성당 안이 빽빽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미사용 벤치는 치워졌고 다들 선 채로 미사를 시작했다. 앞쪽으로 조금 더 이동해보려고 했지만 성전 앞쪽엔 이미 낄 여지가 전혀 없었다.
눈대중으로 대충 봐도 수천명이 될 듯했다. 오른쪽 복사석이 살짝 보이는 자리까지 비집고 들어가 성호를 그었다. 은으로 장식된 제단 앞에 붉은 커튼이 길게 드리워져 있고, 제단 우측에 태양관을 쓴 성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중앙의 검은 예수상은 기둥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사가 시작됐다. 집전하는 사제의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내가 준비한 매일 미사 책을 보며 미사 내용을 챙겨본다. 조금씩 옆으로 자리를 옮기니 성전 중앙의 검은 예수님 상이 살짝 보였다. 원래 성당내 촬영은 금지돼 있지만 미사 중에 다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나도 눈치껏 틈틈이 성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데 미사가 너무 길었다. 오전 7시가 넘어가는데도 신부님의 강론이 끝없이 이어졌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호텔로 돌아가 식사를 마치고 오전 8시까지 집합해야 한다. 하지만 성지가지를 손에 들고 꽉찬 성당의 인파를 뚫고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겨우 바깥으로 빠져 나와보니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미사 드리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음날 아침인 월요일 오전 9시 평일 미사에 다시 참석했다. 전날과 달리 성전 바로 앞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미사 시간 외는 성당은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탓에 이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촬영도 금지였지만 미사 중에는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고 제지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성전 바로 앞에서 노란색 무늬의 치마를 입은 안짱다리 검은 예수님 '헤수스' 사진을 마음껏 찍는 행운을 누렸다.
은으로 장식된 제단은 검게 변색돼 있어 그리 화려해보이지 않았다. 검은 예수님 뒤로 붉은색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제단 양쪽에서는 미사가 진행되는 내내 검은 예수님 상을 향해 붉은색 꽃잎을 쉴새없이 뿌려졌다. 예수님의 머리 위 가시관과 양쪽 팔 위에는 뿌린 꽃잎의 일부가 걸려있다. 나중에 보니 검은 예수상에 뿌려지던 붉은 꽃잎은 사루비아 종류였다. 신자들이 자신이 챙겨온 꽃잎이 미사 중에 뿌려지기를 기대하며 준비해온 것이다. 운이 좋은 사람은 자신의 꽃잎이 미사중에 뿌려지고, 아니면 이날 오후에 성전 밖으로 행차할 때 뿌린다.
성전 좌측 보좌신부님들이 앉아있는 의자 뒤로 소문으로만 듣던 '최후의 만찬' 그림이 보였다. 미사 후 제대로 촬영하기 위해 그림 앞으로 갔지만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보안요원들이 사진 바로 앞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멀리서 찍었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산타마리아 성당에 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쿠스코 성당에 걸린 최후의 만찬 성화는 케추아 예술가 마르코스 사파타(Marcos Zapata)가 그린 작품으로, 예수님이 죽기 전날 저녁에 제자 12명과 식사를 하는 장면인 원본과 구도는 동일하지만 잉카 원주민의 문화를 보탰다. 만찬 식탁에 포도주 대신 옥수수로 만든 술 '치차'가 올려져 있고, 가운데 큼직한 접시에는 이 지역 전통요리인 꾸이구이처럼 보이는 음식이 올려져 있다.
음식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모습이다. 유다의 얼굴색만 붉은색을 칠하고 정면을 쳐다보도록 그렸는데 유다의 얼굴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로 바꿨다. 오랜시간이 흘러 가톨릭이 국교가 되고, 공용 언어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스페인에 대한 원망은 크지 않지만 잉카의 재물을 약탈하고, 만행을 저지른 정복자 피사로 형제들에 대한 페루사람들의 감정은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검은 예수님의 행차
쿠스코 대성당은 이제 천주교 신자가 90%나 되는 쿠스코 시민의 정신적 안식처가 됐다. 특히 부활 축제인 세마나 산타 축제가 열리면 전국에서 검은 예수님 상을 보기 위해 수만여명이 몰려든다. 지진에서 시민을 지켜준 쿠스코 수호성인 검은 예수님이 1년에 딱 한번 부활절에 성전을 나와 아르마스 광장을 행진한다.
패키지 일행과 헤어지고 개인 여행을 시작한 첫날 아침부터 쿠스코 시내 주변의 민속박물관, 미술관, 산 페드로 시장을 돌아다녔다. 점심식사는 미리 소개받은 사랑채라는 한식당에 들러 모처럼 한식을 맛봤다. 그리고 나서 광장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소문난 대성당 건너편 2층 카페, 카푸치노에 자리를 잡았다. 이날 오후 3시에 있을 검은 예수님의 성당 밖 행진 행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하다.
군 의장대가 도열한 가운데 지붕 종탑에서 40m까지 울림이 퍼진다는 남미 최대의 대성당 종이 울렸다. 가벼운 비가 내리는 가운데 검은 예수님이 성문을 통해 성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예수님은 우산을 들거나 우의를 입고 몰려든 수천명의 사람들의 붉은 꽃(사루비아 종류) 세례를 받으며 광장을 나섰다. 검은 예수님은 내리는 비로 잠시 대기한 후 큼직한 투명 비닐 우장을 입고 아르마스 광장을 도는 행진이 했다.
쿠스코 일정을 개인적으로 이틀 연장한 덕분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성당 부활절 검은 예수님 행진을 직관했다. 옥수수, 꾸이요리 그리고 피사로 얼굴이 들어간 쿠스코형 최후의 만찬 작품을 볼 수 있는 행운까지 얻었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