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년 여행노트] 전통의 '촐리타'와 현대의 '텔리페리코'
2024-11-18
남미는 빼어난 자연경관뿐 아니라 서구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의 흔적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한달 가까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20편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태고의 자연경관, 역사, 그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가는대로 담았다. 남미를 다녀온 분들에게는 추억 돌아보기로, 여행을 계획중인 분에게는 사전정보로, 남미라는 외딴동네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제15편 [꽃중년 여행노트] 지배와 저항의 역사가 공존하는 '산티아고'>에서 이어집니다.
남미여행지 5개국 가운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칠레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볼리비아 라파스(La Paz)로 향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여행할 지역은 볼리비아 라파스를 비롯해서 우유니 사막 그리고 페루의 쿠스코 등 모두 해발 3500m가 넘는 고산지대여서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라파스 위성도시인 엘알토(El Alto)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40분. 비행시간은 두시간 남짓에 불과했지만 도착하니 공기부터 달랐다. 좌석에서 일어나자 고산지역의 희박한 공기에서 숨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날 정도였다. 가이드가 '고산증'에 대비해야 한다며 나눠준 약을 먹었지만 사실 별소용이 없었다. 가능한 천천히 걸으며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 대합실로 나왔다. 대합실에서 고도를 확인해보니 4076m다. 칠레 산티아고 고도가 570m이니 고도차가 3500m에 이른다. 수화물을 찾아 끌고 전용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버스를 타고 호텔이 있는 라파스 시내로 가다가 전망좋은 곳에 들러 시내를 잠시 내려다봤다. 산 중턱에 하얀 구름이 깔려있다. 구름 아래 높은 지역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집들이 빼곡했다. 낮은 지역에는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도심은 그나마 숨쉬기가 조금 나은 지역이라고 한다. 우리가 묵을 호텔도 그 동네라고 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구름 아래 케이블카가 줄에 매달려 지나갔다. 평화의 도시 라파스의 대중교통을 담당하는 '텔레페리코'다.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꽃들이 보여 카메라 들이대느라 앉았다가 아무 생각없이 벌떡 일어나니 머리가 핑 돌았다. 여기서는 뭐든 천천히 해야겠다.
◇ 라파스 '마녀시장'에 가다
엘알토 공항에서 라파스까지 버스로 30분이 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광도 많아 달라보였다. 곳곳에 얼록달록한 색으로 '평화의 도시 라파스'라고 새겨진 벽화나 조각이 보였다.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띄였다. 라파스는 해발 3640m에 위치한 볼리비아 행정수도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다. 우리 숙소는 해발 3300m이니 라파즈에서도 비교적 저지대에 있지만 내 몸의 평화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녹색 포장의 차를 마셨다. 끓는 물에 코카 잎을 우린 '코카차'(Mate de Coca)다. 말로만 듣던 고산 증상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실감나게 느낀 우리는 이 차가 고산병, 특히 두통에 효과가 있다는 말에 다들 열심히 마셨다.
코카 차 한 잔으로 힘을 내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녀시장'이다. 꽃이나 열매를 말린 것, 향료와 약초, 다양한 구슬을 꼬아 만든 목걸이, 여러가지 색깔의 약물이 든 병들이 보였다. 소문대로 길흉을 점치는 점술사, 악령을 쫓는 주술사들에게나 필요할 듯한 정체불명의 공물과 재료들이 즐비하다.
가게 바깥에 길게 걸려있는 하얀 털이 말린 새끼야마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털도 나지 않은 야마, 즉 태아를 그대로 말린 것이다. 제사 지낼 때 쓰는 가벼운 물품도 많았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수확철이나 새 집을 지을 때, 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에게 제사를 지내다. 안데스 토착신앙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마녀시장 가게 안에 공물들 한 가운데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숄을 어깨에 걸치고 꼼짝 않고 앉아있는 여인의 깊은 눈길을 마주보기가 쉽지 않았다.
마녀시장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니 관광객 상대로 하는 토속공예품 시장이 나왔다. 알파카 털로 짠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색상의 공예품들이 가게 안과 밖에 가득했다. 크고 작은 가방과 모자, 신발, 머플러, 장갑, 숄, 스웨터, 전통인형, 야마 기념품 등 종류도 다양했다. 좁은 골목 위를 색색의 우산으로 장식해둔 것도 참 예뻤다. 가게를 이웃거리며 사진도 찍고 골목을 숨가쁘게 걸었다. 빈 벽면마다 그려진 원색의 벽화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게를 지키는 여인들 그리고 이 거리에서 쉽게 만나는 원주민들의 전통복장이었다.
◇ 산프란시스코 광장과 대성당
전통공예품 시장에서 멀지 않는 곳에 '산프란시스코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관광객과 주민들이 넘쳐나고 다양한 공연들이 펼쳐진다고 들었는데 막상 가보니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미는 홈리스들이 더 많아 보였다.
대성당 문은 열려있는데 출입을 막았다. 빼꼼 들여다보니 미사중이었다. 미사에 참석한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스페인 식민시대에 지은 대성당답게 금색 장식의 화려한 성전의 규모가 엄청났다. 사진을 못 찍게 해서 눈으로만 담고 곧바로 나오는데 문 앞에 손내미는 사람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대성당은 바로코 양식의 규모도 엄청났지만 외벽에 새겨진 부조들도 독특했다. 외벽에 새겨져 있는 부조들은 볼리비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지의 여신인 '파차마마' 그리고 코카 잎을 물고 있는 창조의 신 '비라코차'의 모습이라고 했다. 토속신앙 속에 뿌리내린 볼리비아 가톨릭의 단면이 아닐까 싶었다.
◇ 무리요 광장의 거꾸로 가는 시계
'무리요 광장'은 원래 식민도시 어디에나 있는 아르마스 광장이다. 독립전쟁의 영웅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가 여기서 교수형을 당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광장 한가운데 동상을 세우고 광장 이름도 '무리요'로 바꿨다고 한다. 동상 사면에 평화(PAZ), 힘(FUEREA), 명예(GLORIA), 단결(UNION)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광장에는 20세기초 신고전 양식으로 건설된 아름다운 국회의사당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의사당에 붙어있는 시계가 특이했다. 숫자가 거꾸로 배열돼 있고, 시분침도 거꾸로 움직였다. 볼리비아 좌파 대통령이자 원주민 출신이었던 에보 모랄레스가 혁명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거꾸로 가는 시계로 만들었다고 한다. '남반구의 시계' 혹은 '좌파의 시계'라고도 불린다.
광장 우측에 분홍색의 대통령궁과 그 옆에 독립 100주년 기념 성모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통령궁에는 붉은색 계열의 예복을 입은 근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3층에 3개의 깃발이 보였는데 가운데가 빨강, 노랑, 초록의 볼리비아 국기였다. 왼쪽 깃발은 원주민을 상징하는 7색깔의 격자 국기 위팔라였다. 이 광장에는 관광객이나 주민보다 훨씬 많은 비둘기들이 모여살고 있다. 모이를 주는 사람들 옆으로 비둘기들이 경쟁하듯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이 많은 비둘기 똥은 누가 치울까 싶은 생뚱맞은 생각이 스쳤다.
◇ 낄리낄리 전망대와 하엔 골목
라파스 시내를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바로 '낄리낄리' 전망대다. 전망대에서 시내를 둘러보니, 고층빌딩이 몰려있는 저지대 부촌과 빨간지붕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지대 빈촌이 확실하게 구분됐다.
이 전망대는 1781년에 저항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당시 원주민 지도자 투팍 카타리와 그의 아내 바르톨로나 시사가 라파스를 6개월간 포위하고 봉기 일으킨 곳이다. 카타리는 체포된 후 사지를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다. 그의 머리가 이곳에 묻혔는데 새들이 날아와 낄리낄리하고 울었다고 한다.
하엔 골목은 식민시대의 스페인풍 가옥과 양식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다. 식민시대를 지배한 어떤 민족에게는 향수를 느끼는 관광지이겠지만 식민시대에 수탈을 당한 민족에게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다. 박해를 당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쇠고랑 소리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귀신이 되어 비명이 들린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골목의 우측 끝 저택의 이층 벽에는 퇴마를 위한 초록색 십자가를 세워져 있다. 스페인풍 가옥이 즐비한 골목이지만 골목의 명칭은 볼리비아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인 '하엔'을 붙였다. 골목 중간쯤 좌측에 국가문화유산으로 보호되는 저택이 보였다. 독립영웅 무리요 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데, 실제로 그가 살았던 집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엔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파차마마의 화가 마마니마마니의 화실이 있다. 로베르토 마마니마마니는 볼리비아의 대표적인 작가로 강렬하고 생생한 색상으로 볼리비아의 토착문화와 국민의 삶을 표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는데 안데스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를 많이 그렸다. 화실을 직접 방문해 전시된 강렬한 색감의 많은 작품들을 감상했다. 작가가 그린 파차마마는 마치 토착화된 성모마리아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글/ 이상홍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여행작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숲 해설가
(전)정보통신기확평가원 원장/ KT파워텔 대표/ KT 종합기술원 부원장/ KT 중앙연구소장
저서=까미노, 꽃중년이 걸은 꽃길, 꽃의 향기 소통의 향기 등